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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6> `붉은 머리의 사람들`과 철릭

중앙亞 토착화 유럽인 계통의 의복 `철릭`… 고려때 도입돼 우리옷 속에 이어져

흑해연안 시작 목축 동쪽으로 확산돼 유럽인 계통 이동, 초원지대 유입

고구려땐 '철륵'으로 북방지역에 출현

후손 '정령' '철륵' 우리 전통의습 '철릭'의 기원이 돼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3-15 20:14:5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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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중국에서는 사방의 이민족을 이만융적(夷蠻戎狄)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각각 방위를 따라 동·남·서·북쪽 이민족을 말한다. 이중에 이는 동이족이며, 융과 적은 주로 초원지역 사람들을 일컫는다. 200여 년 전부터 서양학계는 중국 북쪽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유럽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심지어는 로마와 파르티아의 카레이전투 와중에 실종된 로마병사의 일파가 중국의 감숙성 언저리에 살고 있다는 연구가 100여 년 전 영국학자에 의해 제기된 이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붉은 머리의 사람들'을 찾아서

또한 러시아의 유명한 역사가 그룸-그루지마일로와 구밀료프는 '붉은 머리의 사람'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즉, 북쪽의 오랑캐인 '적(狄)'의 일파 중에 백적(白狄), 또는 적적(赤狄)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중국 북방에 살던 서양인인 '붉은 머리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시대 흉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한나라 장군 진탕(陳湯)이 노란 머리에 큰 코를 가진 포로를 생포했다는 기록 등 서양인의 흔적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과연 그들은 언제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조선시대 철릭 모습. 초원 기마인의 옷이고려시대에 도입된 이후 700여년 세월 동안 우리 문화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인 계통의 전통은 비교적 오래됐다. 약 5500년 전 흑해 연안에서 처음 시작된 목축이 초원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부터이다. 과거에는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불렸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주의 실크로드 지역에서는 건조한 기후 때문에 보존상태가 좋은 유럽인종 미라들이 자주 발견된다.

바로 목축을 하던 사람들의 후예로 지금 신장성의 위구르인은 중앙아시아의 유럽인 전통이 이어져온 결과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성산(聖山)인 알타이에 이들 유럽인종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부 시베리아의 파지릭문화의 미라에도 있다. 초원지대로 유입된 유럽인종이 현재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유는 이들이 목축이라는 독특한 경제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붉은 머리의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에 토착화된 유럽인 계통을 의미한다.


정령 그리고 철륵족

몽골에 남아 있는 석인상. 철릭형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둘렀다.
중앙아시아와 초원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천재'와 '자기도 천재라고 착각하는 바보'로 나뉜다는 농담이 있다. 그만큼 수많은 민족이 점철돼 있기 때문에 연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로 초원지역의 민족들은 대부분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민족의 흥망도 무척 잦았다. 그러니 멀리 떨어진 중국의 역사기록도 아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붉은 머리의 사람들'인 흉노가 발흥하던 기원전 3세기에는 현재의 남부 시베리아와 신장성 일대에 유럽 계통 인종이 정령(丁零)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현한다. 정령은 딩룩 또는 텔레 등으로도 불렸는데, 유목민족이었기에 초원지대 곳곳으로 이동해서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동쪽으로는 바이칼 지역까지 그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 전성기 무렵 정령은 철륵(鐵勒)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북방에 출현했다. 철륵은 문화적으로는 투르크(돌궐)계통이며, 고구려의 선진무기를 자신들의 유목문화와 결합시켜서 그 세력을 키웠다. 이후 철륵은 몽골제국에 편입되었고 현재는 알타이 근처의 텔레우트족, 케트 족 등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발해의 북쪽 변방에 위치했던 행정구역 중 철리부(鐵利府)가 있는데, 바로 철륵 민족이 살던 곳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철륵족이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초원지역 '붉은 머리의 사람들'의 후손인 정령과 철륵은 우리나라 전통 의습(衣褶·옷장식)인 '철릭'의 기원이 되었다. 철릭은 고려가요 정석가에 '무쇠로 철릭을 만들어서 옷이 다 닳으면 님과 헤어지겠나이다'라는 구절로 처음 우리나라 기록에 등장한다. 철릭이란 고려~조선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일종의 도포같은 옷으로 허리띠를 여미는 것이 특징이다. 융복(戎服)이라고도 했으니, 북쪽 이민족으로부터 수입된 옷을 의미한다. 바로 원나라의 강력한 영향을 받던 고려시대에 들어온 원나라풍의 옷이다.


우리 전통 옷 속의 철륵족

안동대 이은주 교수는 이 철릭은 몽골인들이 승마시 편리함을 위해 착용했던 벽력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철릭은 천익(天翼), 천닉, 털릭 등 다양하게 불렸는데, 'terlig'이라고 하는 몽골어를 음차한 것이다. '테를릭'은 곧 정령(텔레)과 철륵을 의미하는 것으로 철륵 계통의 민족이 입었다는 뜻이다. 치파오를 만다린 드레스라고 하듯 특정 민족의 이름이 옷 이름이 되는 경우는 흔히 있다. 알타이와 몽골의 초원지대에 남아 있는 돌궐의 석인상은 마치 가운처럼 길게 늘어뜨린 상의에 허리띠를 맨 옷을 입었으니, 바로 철릭 옷의 기원이다.

기마민족인 철륵족이 입었던 이 옷은 원나라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고려의 왕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처음에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 입는 옷이었다. 하지만 말타기에 편하고, 몸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장점 때문에 평민층까지 널리 유행하게 되었고, 조선시대 군복으로도 쓰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박하게 이동하던 왕 이하 신하들이 철릭을 입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전란이 끝나자 철릭의 기능성은 퇴화되어 그 자락이 땅바닥에 늘어질 정도로 장식화되자 여러 차례 이 옷을 입지 말라는 어명도 떨어졌다고 한다.

신장성 누란에서 발굴된 여성 미라(위 사진)와 완연한 유럽 계통으로 복원된 모습.
철릭이라는 초원 기마인의 옷이 고려시대에 도입된 이래 700여 년간 우리 문화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점은 참 신기하다. 조선이 들어선 뒤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원나라 풍속을 금기시했지만 철릭이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편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사회에서도 실용적이며 편리한 북방의 문화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민족들과 문화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초원지대에서 유럽인 계통의 전통이 있다 해서 현재의 역사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19세기 이래로 서양 학자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럽인종에 관심을 가졌을까. 또 중국 문명이 자생이 아니라 서방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우세했을까. 그 배경에는 이런 접근을 통해 서양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식민화하면서 그 정당성을 뒷받침할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 모른다. 중앙아시아 고대의 유럽인종은 엄밀히 말하면 인도-아프간 계통에 가깝기 때문에 현재의 서유럽이나 슬라브인들과는 다르다. 설사 서양인 계통이 있다 해도 그것이 서양문명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스킨헤드들, 초원에서 배워라

철릭을 입은 고려 사람.
결국 '붉은 머리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속내는 서양인들의 우세한 문명이 전파되어야만 세계 전체가 발달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인지도 모른다. 유라시아의 동쪽인 우리나라 또한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지라 서양인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신라시대 처용이나 서역인 계통의 석인상과 같은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원나라의 영향으로 색목인으로 통칭되던 다양한 중앙아시아계 유럽인들이 유입되었을 것이다. 발해인들도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들과 교류했다. 이들 서양 계통의 사람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우리와 교류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철릭이라는 옷에서 보듯 우리 역사에는 중앙아시아 지역 유럽계 인종들과 다양한 교류가 있어 왔다.

최근 인종차별과 폭력을 일삼는 러시아의 국수주의자들인 스킨헤드의 공포가 러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덮치고 있다. 특히 지난달 광주교대 학생이 러시아 청년 3명에 집단폭행당해 사망한 바르나울시는 동서문명의 교류지인 알타이지역이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 불과 400년 전이다. 어떻게 이들이 그 땅이 자기들 땅이라며 외국인을 해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분명한 것은 고대 알타이에서, 또 초원 각 지역에서 인종적 차별은 없었다는 점이다. 고대 시베리아는 몽골로이드가 주류를 이뤘지만, 그렇다고 소수의 유럽인종에게 어떠한 인종차별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서문명의 가운데에서 문명의 전달자이자 동아시아 역사의 활력소로 받아들였다. 초원에서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는 문화교류의 지혜를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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