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산복도로 리포트 <3-4> 산복도로에 살다 : 이들이 있어 살맛나는 산동네

팍팍한 산동네 살이에 온기를 불어넣는 이들

  • 국제신문
  • 배재한 기자 myway@kookje.co.kr
  •  |  입력 : 2010-02-15 20:40:08
  •  |  본지 9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부산 유일 구호병원 서구 암남동 7번지 알로이시오병원 최충언 진료부장
- 경제적 여유 대신 소외된 이들의 아픔 돌보기 선택…9년째 인술 베풀어

- 산동네 아이들 위한 우리누리 공부방
- 22년째 운영해 온 최수연 센터장의 희생과 헌신 위에
- 대학생 200여명의 자원봉사 더해져 동네 쉼터 역할까지

부산의 산허리를 휘감고 있는 산복도로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갓 이사온 '타향살이'도 있지만 20, 30년 이상 살아온 토박이가 기본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으로 정착해 60년가량 살고 있는 사람들도 쉽게 마주친다. 열악한 생활환경을 견디지 못해 하나 둘씩 산복도로를 떠난다. 모두가 저 높은 곳을 지향하지만 산복도로 사람들은 낮은 곳을 향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비탈진 산동네를 떠나 산 아래 평지로 옮긴다. 산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 시대를 거슬러(?) 산동네로 찾아드는 사람들을 보듬는 이들이 있다. 산동네 사람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산동네의 정겨운 이웃이자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 동고동락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 이들이 있어 산동네는 '사람사는 공간이자 살맛나는 세상'이 된다.

■산동네 의사, 아프지 않는 세상을 꿈꾸다

   
지난 9일 부산 서구 암남동 알로이시오기념병원 최충언 진료부장이 입원 환자인 이재균 씨의 수술 부위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 9일 오후 부산 서구 암남동 7번지 알로이시오기념병원 외과 진료실. 이 병원은 부산에서 유일한 무료 자선병원인 구호병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병원의 최충언(48) 외과과장 겸 진료부장은 모처럼 여유가 있는 표정이다. 설을 앞두고 있는 데다 비까지 내려 병원을 찾는 환자가 적었기 때문. 최 부장은 3층 입원실을 찾았다. 대학병원의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이곳에 온 이재균(60·부산 북구 금곡동) 씨의 엉덩이 수술부위를 살폈다. 의료보호환자인 이 씨는 지난해 12월 입원해 두 달째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이 씨는 설이라고 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돌아갈 마땅한 곳이 없다.

이처럼 치료비가 없어 오갈 데가 없는 환자들을 맞는 알로이시오기념병원. 이 병원에서 9년가량 근무하며 늙고 병든 사람들에게 늘 겸손한 마음과 사랑으로 인술을 베푸는 최 부장의 이력은 특이하다.

최 부장은 고신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2년 미 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돼 2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이후 복학해 10년 만에 외과 전문의가 됐다. 최 부장은 부산지역 한 종합병원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다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사태로 어려워진 병원이 외과의사 3명 중 1명을 구조조정하려 하자 '내가 나가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두 달 정도 쉬고 있던 최 부장은 알로이시오기념병원에서 의사를 구한다는 것을 알고 지원 , 이 병원과의 첫 인연을 맺었다.

무료 자선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아미동 남부민동 감천2동 산동네의 늙고 병들어 소외된 사람들이다. 의료보험증도 없는 환자가 더 많다. 병원 재정이 좋을 리 없었다. 외과과장을 맡았던 당시 그가 받았던 월급이 300만 원이 안됐다. 그의 월급봉투를 받아든 아내는 "남 구제하지 말고 우리집부터 구제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남매를 둔 가장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2005년 7월 그는 8년 가까이 근무한 알로이시오기념병원을 그만두고 남부민의원으로 옮겼다. "제가 병원에 사표를 내자 외과의사를 구하지 못해 계속 비워둔 상태였습니다. 원장 수녀님의 요청도 있고 해서 3년 8개월의 남부민의원 의사를 접고 작년 4월 다시 알로이시오기념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다시 알로이시오기념병원으로 돌아가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병원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앞으로도 역할이 남아있었습니다. 제가 안가면 외과의사가 없어 수술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병원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진료실을 찾는 사람은 얼굴만 다를 뿐 공통점이 있다. 재래시장 한 켠에서 야채를 팔며 고혈압에 시달리면서도 약값을 걱정하는 송영 할머니, 만성 간염에도 파스만 붙이고 일터로 나가는 순임 씨, 낯선 이역 땅에 와서 프레스 작업을 하다 손가락 세 개가 으스러진 필리핀 이주노동자 글렌 등등…. 한마디로 산동네의 가난한 이웃들이다.

20년 넘게 송도의 산동네에 살면서 산동네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진료하면서 의사로서 한계도 많이 느꼈다"면서 "이 병원에서 정년을 맞게 되면 무료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 문화원 사건으로 구속돼 0.98평의 독방에서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며 그는 장차 걷게 될 의사의 길을 그렸다. "생명을 다루면서 가난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장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아프지 않는 세상, 아파도 돈 걱정없이 치료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산동네 공부방, 조용한 기적을 만들다

   
부산 사하구 감천2동 산동네 아이들의 집이자 제2의 학교인 '우리누리 공부방'.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부산 사하구 감천2동.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과 계단을 힘겹게 따라가다보면 마주치는 '우리누리 공부방'.

비탈진 산동네에 자리잡은 우리누리 공부방이 문을 연 것은 1988년11월. 우리누리 공부방이 자리잡은 감천2동은 20~25㎡(7~ 8평) 안팎의 주택들이 대부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곳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학원에 갈 형편도 되지 않는 아이들, 부모가 일터로 나가 텅빈 집에 혼자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우리누리 공부방은 탄생했다.
우리누리 공부방을 처음 시작할 때 신청자가 얼마나 될까 걱정했지만 안내문을 보고 찾아온 아이가 50명을 넘었다. 손바닥만 한 방 두 칸이 전부였던 공부방은 빈틈없이 아이들을 앉힌다 해도 한꺼번에 스무 명 이상은 앉기조차 불가능했지만 그렇게 공부방은 시작됐다.

낮시간에는 초등학생들이, 저녁시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공부방의 주인공이 된다. 초등학교 때 일단 공부방에 들어오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생활한다. 지금도 우리누리 공부방에는 60명의 학생들이 있다. 공부방은 산동네 아이들의 제2의 학교이자 집이다.

이들의 공부는 대학생 자원교사들이 맡는다. 이들은 교사라기보다 공부방의 이모 삼촌들이다. 공부방이 단순히 공부를 가르치는 공간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따뜻한 만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공부방 교사를 삼촌 이모로 부르게 한다. 자원교사들은 말 그대로 산동네 아이들의 이모 삼촌이자 부모역할까지 맡는다. 처음 3명으로 시작한 대학생 자원교사는 이미 20기까지 200여 명에 달한다. 이모 삼촌들은 형제처럼 끈끈한 형제애로 뭉쳐있다. 우리누리 공부방 출신이 대학생이 된 뒤 공부방 교사가 되는 가슴 뿌듯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산동네에 공부방을 열어 22년째 운영하고 있는 최수연 센터장의 헌신과 희생을 빼놓고 우리누리 공부방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할 수 없다. 1988년, 그는 서른셋이라는 삶의 갈림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겠다며 가장 가난한 산동네인 감천2동으로 찾아들었다.

'딱 1년만'이라는 약속을 하고 들어왔지만 그는 이곳에서 7700일이란 시간 속에 묻혔다.

"처음에는 많이 어려웠어요. 파출부 일도 나가고, 마을공동작업장에 나가 부업도 함께 하면서 마을 주민과 벽을 허물었죠." 주민들과 차츰 벽이 허물어지자 우리누리 공부방은 단순히 공부방을 넘어 마을사람들의 든든하고 편안한 쉼터로 변했다. 생활이 어려우니 불화도 잦다. 부부싸움을 하다 쫓겨난(?) 부인들이 갈 데가 없어면 우리누리 공부방을 찾는 것이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다. "'날이 새면 감천2동을 떠나야지'하면서 밤새 짐을 싸놓고 기다리다 날이 새면 다시 풀기를 수 없이 반복했습니다."

   
그가 '딱 1년만'이라는 결심과는 달리 우리누리 공부방의 큰 이모(실제 그렇게 불리고 있다)로 감천2동 산동네의 대모(大母)로 22년을 살아온 것은 의무감 때문이다. 그 의무감이 공부방과 그 공부방에 생활하는 아이들, 산동네 사람들을 떠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교육봉사활동을 하다 대장암으로 지난 달 14일 선종한 천주교 이태석 신부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본 곳이 감천2동"이라는 말을 남겼다. 가장 가난한 산동네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든 중심에 우리누리 공부방이 있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참으로 건강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공부방 아이들을 통해 가난하지만 행복해지는 법도 알았다." '우리누리 공부방이 만든 사소하지만 조용한 기적'은 감천2동을 넘어 부산의 산동네로 퍼져나가고 있다.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

무료만화 &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