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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 리포트 <3-2> 산복도로에 살다 : 4인4색 삶과 애환

산동네와 하나된 풍경같은 사람들

  • 국제신문
  • 글=배재한 기자 myway@kookje.co.kr 사진=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  입력 : 2010-02-01 20:33:44
  •  |  본지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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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도로에 기대어 수십 년 산복도로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 어렵고 힘든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산동네로 찾아들어 이젠 스스로 '산동네'가 되어버린 사람들.
34년을 한결같이 연탄배달을 한 70대 노인, 새벽엔 일터로 저녁엔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가장들을 태워다 준 고마운 버스운전기사, 아이부터 노인까지 산동네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었던 '아름다운 손' 동네 이발사, 산동네 사람들에게 시간을 선물한 시계포 주인. 이들은 산동네 사람들의 소중한 이웃이었고, 이들이 있었기에 산동네는 사람 살 만한 정겨운 공간이었다. 이들이 털어놓는 '지난날'은 바로 산복도로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다.


■그가 있어 겨울이 따뜻했네 - 연탄가게 주인 이준영(71) 씨

- "하루 2000장씩 배달했던 때도…, 지금도 산동네엔 지게로 져다 날라"

   
이준영 씨
부산 동구 초량1동 초량시장 인근에서 34년째 연탄가게를 운영하는 이준영(71) 씨. 번듯한 간판 대신 건물 벽면에 전화번호와 이 씨의 휴대전화 번호가 큼지막하게 인쇄돼 있었다. 서너 평 남짓한 이 씨의 연탄가게는 세월을 말해주는 듯 낡고 좁았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이 씨는 일터를 찾아 부인 차정숙(62) 씨와 함께 부산으로 와 이곳에 정착했다. "특별한 기술이나 돈이 없어도 힘 있고 부지런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연탄배달이라 시작했지. 연탄 한 장 값이 40~50원 하던 시절이었던 1970년대만 해도 연탄배달하는 일은 괜찮은 일자리였어."

검은 원통형에 구멍이 19개여서 19공탄이라고도 불리는 연탄. 3.6㎏의 왜소한 몸집의 연탄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온국민의 사랑을 받던 국민의 연료였다. 특히 산동네 서민들은 겨울이 오면 꼭 준비하는 세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쌀과 김장, 연탄이었다. 이 세가지는 그리 넉넉지 않은 그 시절, 우리네 겨울을 너끈하게 넘길 수 있는 힘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연탄은 가족을 모진 추위로부터 지켜준 유일한 수단이었다.

"1980년 후반까지만 해도 하루에 2000장 넘게 배달했지. 그때는 리어카에 싣고 가 좁은 골목이나 계단길은 다시 지게로 져다 날랐어." 한창 때는 3.6㎏짜리 연탄 30장(78㎏)을 한 번에 지게에 지고 배달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약해져 딱 절반인 15장씩 져다 나른다. 젊은이도 얼마 못올라 숨이 턱까지 차는 산동네 가파른 비탈길, 연탄을 지고 힘겹게 오르는 이 씨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젊었을 때는 먹고 살아야 하고, 또 아이들 공부시켜야 하니 힘든 줄도 모르고 죽을 판 살 판 (배달)했지. 배달이 밀려 일손이 달릴 때는 집사람도 리어카로 연탄배달에 나섰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탄은 기름과 가스보일러에 밀려 점차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이 씨의 연탄배달도 예전같지 않지만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은 산동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연탄을 찾을 수밖에 없다.

   
"요즘은 하루 400장을 주문받기도 힘든 상황이야. 연탄 한 장 값는 600원으로 많이 올랐지만 수입은 훨씬 줄었어. 연탄 기부도 많아져 우리같은 사람은 벌어먹기 더 힘들어졌지." 이 씨는 지난해 경운기를 개량해 15년가량 사용하던 일명 '딸딸이'를 폐기처분하고 연탄배달용 0.5t짜리 경트럭을 장만했다. 그렇지만 힘들기는 매 한 가지다. 차가 들어갈 만한 곳에 위치한 사람들은 그래도 살림살이가 나은 편이라 기름이나 가스보일러로 바꾸고 지게로 져다 날라야 할 곳들은 여전히 연탄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

"지게 지는 것이 힘도 들고, 이젠 그만 둘 때도 됐지. 그런데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산동네 가파른 골목집에 연탄을 날라다 줄지 걱정이야."

산동네 연탄 아궁이가 사라지기 전까지 연탄 배달 일을 그만 둘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씨. 어쩌면 산동네에 연탄이 필요없는 그날, 이 씨가 연탄 지게를 내려 놓는 날이 될 것이다.


■산동네 주민의 발노릇 22년 - 시내버스 기사 김재영(51) 씨

- "산복도로 달린 지 벌써 22년째…젊은층 빠져나가 대부분 노인 승객 "

   
김재영 씨
봉래산을 끼고 영도 산복도로를 운행하는 유한여객 82번 시내버스 운전기사 김재영(51·부산 서구 서대신동) 씨. 새벽 5시부터 밤 11시까지 22년째 영도구 청학2동 영도 산복도로를 거쳐 봉래동~신선동~영선동~남항동~부산역~전포동을 오가며 산동네 주민의 친근한 발노릇을 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는 시내 일터로 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낮에는 주로 노인들입니다. 그리고 밤에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입니다. 낮에는 시내로 나가는 사람이 많고 밤에는 들어오는 사람뿐인 것이 산복도로 승객의 특징입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산동네 사람들의 생활패턴이 버스 승객 형태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젊은 사람이 빠져나간 산동네, 노인들이 늘면서 버스기사의 걱정도 늘었다. "노인들이 많이 타는 낮 시간대는 노인들이 자리에 앉은 다음 출발하죠. 또 차가 완전히 정차한 뒤 노인들이 좌석에서 일어나 하차하도록 안내합니다."

김 씨도 버스운전을 시작할 때 영도 산복도로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100만 원짜리 단칸셋방에서 두 살 난 딸과 세식구가 생활했다. 그러다 사하구 감천동을 거쳐 서대신동으로 옮겼지만 여전히 산복도로에 살고 있다.

산복도로를 달린지 22년. 김 씨에겐 산복도로 사람들이 이제 승객이자 친근한 이웃이다. "노인들이 많다 보니 타고 내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힘들게 버스에 오르는 노인들을 보면 제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택시타고 가시라고 손에 쥐어주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듭니다." '승객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김 씨는 버스 공영제 실시로 기사들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과속하지 않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다고 말했다.


■시간을 선물한 희망사 시계점 - 시계점 주인 최용철(72) 씨

- "친구한테 배운 시계수리 기술로 40년 넘게 밥벌이…요샌 손님 뚝 끊겨"

   
최용철 씨
색이 바랜 나무에 새겨진 '희망사 시계점'이라는 간판 아래 2평 남짓한 시계포가 자리잡고 있다. 벽에 빼곡히 걸린 20여 개의 벽시계에는 2만 원, 2만5000원, 2만8000원이라고 가격을 써 붙여놓았다. 선반과 진열대에 자명종 시계가 22개, 그리고 전자 손목시계와 시계줄…. 1965년부터 부산 동구 초량6동 부산구봉우편취급국 옆에서 45년째 시계포를 운영하는 최용철(72) 씨. 황경북도 성진이 고향인 최 씨는 6·25전쟁 때 피란 온 실향민 1세대다.
"시계 고치는 기술을 친구한테 배웠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계가 귀한 시절이라 판매도 잘 됐고 수리물량도 많았지. 애들이 중학교 입학하면 큰 마음먹고 시계를 사가는 사람도 많았어." 1980년대 들어 전자시계 보급이 본격화되고 값싼 중국산 시계가 들어와 노점 등에서 팔리면서 시계점을 찾는 사람이 급격히 줄었다.

"요즘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도 있어. 전자시계 약(배터리)을 갈거나(교환하거나) 시계줄 바꾸러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최 씨는 "이제 그만둘 때도 됐지만 놀면 뭐하겠어. 하루 한 두 사람씩 찾아오는 사람의 시계도 고쳐주고, 몇 푼이라도 버는 것이 낫다"면서 "시계점으로 자식(2남1녀) 공부시켰고, 또 자식들이 잘 자라줘 나에게 이 시계점은 이름대로 희망을 줬다"고 말했다.


■40년째 시간이 멈춘 '타임머신 이발소' - 이발사 이영우(68) 씨

- "1980년대엔 직원 셋 두기도…, 50대 이상 손님들 드문드문 찾아와"

   
이영우 씨
산복도로 망양로 부산컴퓨터과학고에서 부산고 쪽으로 내려가다 마주친 연창이발관. 유리샷시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 보니 이발하는 사람은 없고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 이영우(68) 씨가 노인 2명과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죽에 구멍이 숭숭 뚫린 이발의자, 물을 받아 두는 콘크리트 수조, 변색된 전면 거울, '조발 7000원, 카트 6000원, 중고생 조발 4000원'이라고 써 붙인 가격표…. 영락없이 기자가 유년시절 보았던 이발소의 풍경을 만났다. 시간이 멈춘 타임머신 이발소. 아니나 다를까, 이 씨는 1970년부터 이곳에서 40년째 이발소를 하고 있다.

"요즘 손님 없어. 젊은 사람이 간혹 오기도 하지만 주로 50대 넘은 노인들이지." 기자가 취재를 위해 이발관을 네 차례 찾았지만 손님이 있을 때는 단 한 번, 지난 1월 30일 토요일이었다. 때마침 머리를 깎고 있던 김천수(62·부산 동구 초량2동) 씨는 "미장원에는 갈 수 없어 한 달에 한 번씩 여기에 와서 이발한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얼굴과 머리모양이 제각각인데 40년 이상 머리를 깎으면서 어떤 원칙과 비법이라도 가지고 있을까. "그 사람의 얼굴과 머리결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아름답죠."

이 씨도 한 때는 직원을 세 명이나 둔 적이 있었다. "1980년대 경기 좋을 때 면도사를 포함해 직원을 세명이나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서 머리를 깎기도 했죠. 차츰 젊은이가 빠져나가고 미장원이 생기면서 손님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산복도를 끼고 있는 업소나 가게의 한결같은 흥망성쇠 사이클을 이 이발소도 그대로 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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