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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93> 안상학 시인과 함께한 안동

작고 낮고 어두운 곳 향하는 안동사람 마음이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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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작가 故 권정생의 가난·검약 묻어나는 오두막집·빌뱅이언덕…
- 인세·원고료 모아 소외계층 돕는 '권정생의 책' 까지 사람 내음 물씬
- 황톳길 그대로 놔둔 병산서원 가는 길, 영산암 마루에 걸터 앉아 쬐는 햇볕은
- 빡빡한 삶 속에서 고독의 소중함 맛보게 하는 듯

봉정사 영산암에서 툇마루에 걸터 앉은 독자들이 안상학(오른쪽) 시인의 설명을 듣고 있다.
좀 길다 싶어도 전문을 다 옮겨야 맛이 나는 시를 만났다. 제목은 '안동숙맥 박종규'.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안상학 시집 '아배 생각' 수록·애지출판사)

안동까지 가서 안상학 시인을 만나고 보니, 이 시에 '안동의 마음'이거나 '안상학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알 것 같다. 친구가 식당에 왔을 때 기다리지 않도록 미리 칼국수를 시켜놓은 마음,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식어가는 국수를 보면서도 친구 오기 전까지는 젓가락을 대지 않는 마음, 알고 보니 친구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발견한 마음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빛나는 전통'을 들먹일 것도 없이, 안동의 마음이, 안상학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안상학 시인을 만나기 위해 부산에서 안동으로 찾아간 문학기행 일행은 남녀노소 약 30명. 제목은 '안상학 문학기행'이었는데, 일행이 처음 간 곳은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빌뱅이언덕'의 동화작가 고 권정생(1937~2007) 선생이 1983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오두막집이었다. 안동에서 나고 자란 안상학 시인은 1980년대 초부터 권정생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고 지금은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이다.

■권정생의 책, 안동 특산물이 되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권정생 선생이 살던 집 내부 모습.
안동에 여행 가실 일이 있다면 이 '권정생 선생 살던 집'에 꼭 가보실 것을 권한다. 집 뒤 빌뱅이언덕도 올라보실 것을 권한다. "한 평생 가난하고 지독히 검소하게 살다 가셨습니다. 자신이 먹고 입고 편하기 위한 일에는 도통 돈을 쓰지 않으셨어요. 돌아가셨을 때 저희가 '병원비와 장례비를 모아야 하지 않겠냐'고 의논을 했죠." 그런데 타계한 뒤 지인인 정호경 신부가 관리하던 통장에 10억 원 넘는 돈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선생이 남몰래 노인 어린이를 위해 수천만 원 씩 기부하고 남은 돈이었다. 인세와 원고료를 그는 고스란히 모아뒀던 것이다. 그는 유서를 통해 '남북한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고 당부했고, 그 돈은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의 밑거름이 됐다. "지금도 한해 1억5000만 원 가량 인세가 국내외에서 들어옵니다. 재단을 통해 국내외 어린이를 위해 쓰일 것입니다."

그 가난과 검약, '발가락을 간질이는 쥐들'마저 어엿한 생명으로 존중하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 허투루 쓰지 않았던 정신, 딱새를 위해 담 한 켠에 지어놓은 새집, 그의 유해를 뿌린 빌뱅이언덕, 종지기로 살면서 동화를 썼던 일직교회가 그 집 안팎에 고스란히 있다.

안상학 시인은 일행을 안동시내의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실로 안내했다. 거기엔 선생의 유품전시관이 있었고 그가 남긴 책도 판매하고 있었다. 30여 명의 일행은 여기서 '책 쇼핑'에 몰두했다. 순식간에 수십 권이 팔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학기행이 진화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여행지에 가서 그곳 특산물을 사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다. 문학기행은 그 쇼핑목록 특산물을 안동소주나 안동간고등어에서 '권정생의 책'으로 확장시켰다. 책이 특산물이 된 것이다.

안동시 풍천면 낙동강가에 있는 병산서원은 과연 일품. '정신과 건축의 만남' '유교와 건축의 만남'이란 면에서 단연 최고봉이다. "사시사철이 저마다 아름다워요. 얼마 전 큰 눈이 왔을 때 모든 색감이 사라지고 흑백 산수화처럼 천지가 변해버린 풍광이 참 좋았죠. 3월의 밤에 병산서원 모래사장에 앉으면 달이 저 산의 능선을 따라 떠오릅니다. 마치 달이 등산을 하는 것 같지요. 막걸리 한 잔 마시면 조금 올라가 있고, 또 한 잔 마시면 또 조금 올라가 있고…."

병산서원 진입로 일부 구간은 지금도 비포장이다. 황톳길 그대로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병산서원에 올 때 저 흙길을 지나왔다. 대도시 같았으면 당장 4차로 확·포장을 끝내버렸을 것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같은 전문가들도 그랬지만 안동 주민들도 나서서 포장하지 말고 황톳길 그대로 놔두자고 했습니다. 병산서원을 흙길을 밟으며 올 수 있는 명소로 두자는 것이죠." 안 시인의 설명이다. 안동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한국 최고(最古) 목조건물 극락전이 있는 봉정사에 영산암이 있다. 병산서원과 함께 한국 10대 건축물로 꼽히는 곳이다. 영산암은 작고 조화롭고 아늑하다. 수도 도량인데 건물 여섯 채가 마당을 중심으로 절묘하게 배치돼 있다. 영산암 마당에서 안 시인은 또 한 번 '문학기행의 진화'를 이끌었다. "한 몇 분만 마루에 걸터 앉아 아무 말 하지 말고 마당을 느껴봅시다." 문학기행은 이래야 한다.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이렇게 잠시나마 아무 것 하지 않고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평소엔 워낙 일정이 빡빡해 그럴 짬이 잘 없었다. 영산암 마당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쩌다 침을 뱉다가/국화꽃에게 그만//미안하고 미안해서/닦아주고 한참을 쓰다듬다가 그만//그동안/죄없이 내 침을 뒤집어 쓴/개똥, 말똥, 소똥에게 미안해서 그만//국화꽃에게서 닦아낸 침을/내 가슴에도 묻혀 보았더니 그만//국화 향기가/국화 향기가 그만'('국화에게 미안하다' 전문·'아배 생각' 수록)

■작고 낮고 어둡고 쓸쓸한 곳에서

봉정사를 내려와 논둑길을 걷고 있는 안상학 시인(맨 앞에 선 이)과 문학기행 일행.
"시인은 높은 곳, 힘 있는 곳, 잘나고 멋진 곳에는 눈길이 올라가지 않아요. 작고 어둡고 쓸쓸하고 슬픈 것들에 눈길이 내려가는 이상한 시선 장애인들이 시인이에요. 저도 그렇고요. 박용래 시인은 자주 길을 가다 쭈그려 울었대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봐! 여기에 꽃이 피었어' 그랬답니다. 자비의 자(慈)는 어미가 자식에게 젖을 물리는 형상, 비(悲)는 아이에게 줄 젖이 나오지 않아 슬퍼하는 형상이라고 해요." 안 시인은 "그런 지극한 마음이 배어있는 시가 좋다"고 했다. "어둠 속에 있지만 밝음을 지향하고, 슬픔에서 기쁨을, 없음에서 있음을…비록 그 지향이 꾸는 꿈은 이뤄지지 않겠지만 그렇게 지향하는 것. 그것이 내 시이기 바랍니다." 이것은 권정생 선생이 '세상에서 전쟁과 폭력이 사라지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런 전쟁 폭력 가난이 없는 세상,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잘 뛰노는 세상'을 꿈꾸며 동화를 썼던 것과 똑같았다. 그런 것을 '안동의 마음'이라 칭하고 싶은 여행이었다. '안동의 마음' 한 자락 더 들려드리면서 끝내고자 한다.

'뻔질나게 돌아다니며/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어쩌다 집에 가면/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니, 오늘 외박하냐?/-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야야, 어디 가노?/-예……. 바람 좀 쐬려고요./-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아배 생각' 전문)

신문학기행 참가 문의=부산문화연구회(051)441-0485, 동보서적 803-8000 http://문학기행.kr


▶ 안상학 시인은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남.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 역임. 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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