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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6> 기마민족, 패전국 일본인 달래주다

증거없는 '日 조상 기마민족說' 패전 상처를 달랜 탈출구

1948년 日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 주장

제국주의 시절 향한 향수·데자뷰 작용

천황 단일혈통 주장 훼손 불구 지지받아

해방후 우리나라도 북방기원설 큰 영향

서구문명 쓰나미에 고대사에서 위안 찾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1-04 19:48:09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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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라현 4조 고분에서 나온 말모양 토기.
한국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웃집의 토토로'나 '반딧불의 묘'같은 만화는 패전 이후의 일본인을 2차 대전의 피해자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비판도 많이 받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원폭에 대해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의 피해를 받은 '불쌍한' 나라임을 강조한다.

반면에 당시 식민지였던 주변 나라에 대해서는 별다른 사과가 없다. 얼마 전 뉴스에서 태평양전쟁에 끌려간 한국인 근로자들에게 후생연금의 탈퇴 명목으로 단 99엔만을 지급한다고 해서 온 국민이 허탈해했다. 이런 이중적인 일본의 모습은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일본의 이런 이중성이 고대사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만세일계'를 외치며 125대의 천황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왔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마민족이 일본으로 내려와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러하다.


■일본에 '기마민족설'이 등장한 배경

일본 오타니(大谷) 고분에서 출토된 5세기 후반의 마구.
1945~1952년 일본은 GHQ(General Headquarters)라고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배를 받는다. '대일본'이 아시아를 제패하고 태평양으로 나아가 미국을 침략하다 순식간에 식민지가 된 상황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일본민족의 기마민족설이 등장한다. 패전의 상처가 깊게 남아있던 1948년 도쿄 오차노미즈의 한 찻집에서 일본의 고고학·역사학·민속학자들이 일본민족의 기원에 관한 대담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위대한' 일본민족은 일본열도에서 계속 살던 사람이 아니라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에 의해서 성립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주인공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로 도쿄대를 졸업하고 몽골과 중국을 조사한 고고학자였다. 그의 설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고분시대(서기 4~5세기)에 만주 쑹화강 유역에서 살던 부여계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이 기마민족들은 발달된 기마술과 철제 무기로, 당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일본열도를 지배하고 강력한 야마토국가를 세웠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일본 후쿠오카의 다케하라(竹原) 고분에 그려진 그림. 말을 배에 싣고 있는 모습이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소위 '만세일계'를 강조하면서 '일본은 2600년간 순수한 혈통을 유지한 천황이 다스렸다'던 군국주의 시절의 선전에 반기를 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설에 따르면 천황은 4~5세기께 북방 초원의 민족이 내려와서 원래 있었던 천황을 몰아낸 셈이 된다. 20세기 초반에 일본은 한국과 만주는 워낙 미개하기 때문에 먼저 문명국가가 된 일본이 이들 지역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식민지화했다. 그런데 일본민족의 기원이 바로 식민지의 미개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기마민족설이 나오기 6년 전인 1942년에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이 허구라는 연구를 발표한 일본 고대사 연구의 대가인 스다 고이치(津田左右吉)가 징역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극우파들의 암살협박이 있었을 법도 한데, 반대로 일본 사회에서 기마민족설에 대한 지지는 엄청났다. 도대체 기마민족이 뭐기에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 받아들여졌던 표면적인 이유는 GHQ 덕분이다. 강력한 미군에 패한 일본의 천황은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과 동격으로 되었고, 천황의 자리는 점령군 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이 대신하게 되었다. 또 패전 전에 일본의 지식인과 사회를 강력히 통제하던 일본군부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니 천황의 단일 혈통을 부정한다고 감옥에 끌려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본 사람들이 기마민족설에 환호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정복'과 '교류'는 그 흔적이 다르다

6세기 일본 무사를 표현한 하니와 토기.
기마민족설이 사회적으로 널리 인기를 끈 진짜 이유는 천황제의 부정이 아니라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일종의 향수이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기마민족이 아시아를 제패하고 일본으로 내려왔다는 주장은 사실상 패망 직전 주변을 침략하던 '강한 일본'에 대한 향수이자 데자뷰(기시감·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였다. 또 만주 등지는 패망 전 일본이 정복했던 곳으로 '강한 일본'의 잃어버린 옛 영토이기도 했다. 즉, 원래 일본의 기원은 미국에 패전한 무기력한 일본열도에 있지 않고 북방을 호령하던 초원민족이라고 믿음으로써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하려 한 것이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식민지시절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기마민족설은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에가미의 견해처럼 강력한 기마민족이 남한을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면 남한에서 성립한 가야나 신라가 강력한 기마민족국가로 바뀌어서 일본으로 진출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하지만 에가미는 남한은 그냥 기마민족이 지나쳐가는 '정거장'이었으며, 강력한 국가를 세운 것은 일본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일본에서 기마민족이 세운 강력한 국가가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세운 것으로 보아서 식민사관을 합리화시켰을 뿐이다.

기마민족설은 다소 변형되어서 한국 사회에서도 널리 퍼져있다. 대표적인 예가 '가야의 부여계 기마민족설'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강력한 철제무기와 북방계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데 근거해 부여계의 기마민족이 남하해 기존의 가야 지배세력을 대체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는 요지다. 또,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황금유물들을 근거로 초원민족이 내려왔다고 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필자 역시 초원지역의 강력한 영향으로 신라와 가야의 고대문화가 발전했다고 본다. 수많은 고고학적 자료는 결코 초원지역과의 관련성이 우연이 아닌 것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초원계의 유물이 보인다고 곧바로 대량의 기마민족이 내려왔다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다. 문화적 교류와 전쟁에 의한 정복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상 고고학적으로 볼 때 대량의 기마민족이 내려와서 정권을 바꾸었다는 증거는 없다. 특정한 기마민족이 기존의 사회를 정복하고 왕권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초원과 교류로 역량 커진 점에 주목해야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만약 소수의 기마민족이 한반도와 일본을 바꾸었다면 무덤에서 출토되는 인골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인 생활문화에 커다란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증거나 전쟁의 흔적은 없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초원의 발달된 기술을 유입하면서 가야와 신라는 비약적으로 국력을 신장시켰다. 가야와 신라의 수많은 북방계 문화 요소는 단순히 누군가의 침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다양한 문화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수 있었던 사회 자체의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북방기원설이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필자에게도 많은 사람이 우리 민족의 기원이 알타이인지 바이칼인지를 묻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대답은 똑같다.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지만 일방적으로 초원에서 한반도로 대량의 인구가 유입된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알타이 또는 바이칼 지역을 기원지로 지목한 이유는 어떻게 보면 주변 국가의 침략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였을지 모른다. 마치 쇠락한 양반집 사람이 "알고보면 우리 조상은…" 하면서 위로하는 것과 비슷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 그리고 해방 이후 강력한 서구의 문명이 밀려들어오면서 상대적으로 초라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고대사에서 위안을 찾았는지 모른다.

이제 초원은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막연한 한민족의 기원지라는 상상 속의 땅이 아니라 실제로 교류하는 우리의 이웃이 되고 있다. 가야와 신라가 북방문화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때는 바로 그 국력이 비약적으로 신장하던 때였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도 발전하는 우리 경제와 함께 문화적 역량도 초원으로, 또 아시아로 나아가길 바란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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