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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89> 전국 1호 문학기행특구 장흥

핏빛 서린 역사는 들 넓은 남도땅에서 문학의 꽃으로 피어났다

이청준 송기숙 이대흠 등 한국 대표하는 文人들의 고향

학살과 탄압으로 얼룩진 역사, 두터운 장흥문맥의 자양분 돼

가사문학 주요 발상지 기양사부터 소설가 한승원의 거처 '해산토굴'까지

발길 닿는 곳마다 문학 숨쉬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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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문학공원을 거닐고 있는 문학기행 일행. 천관산은 경치도 아름답지만, 수십 기의 시비(詩碑)로 조성한 문학공원으로도 유명하다.
시장 가고 할인마트 가면 사계절 과일, 열대의 산물, 시간을 딱 가둬놓고 내용물을 오래오래 유통시키는 통조림과 냉동식품이 있어 도시 사람들은 자칫하면 계절감을 잊고 살기 쉽다. 그래서 쉽게 말하곤 한다. "세월이 좋아 요샌 계절이 없어!"

하지만 지구는 생각보다 크고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어서 그 때 그곳에 가보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그 계절만의 풍경은 많고 많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시골의 황금 들녘이 그렇다. 도시인들의 휴가는 여름에 몰려있고, 1년의 일을 대충 끝내고 한 숨 돌리며 정신 차렸을 때는 추수 끝난 뒤인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매주, 매월 교외로 등산 가는 산행 애호가 정도를 빼면 여름의 푸른 들판과 겨울의 휑한 논 풍경이 아닌 황금들녘을 직접 볼 기회가 많지는 않다.

가을에 들로 나가 익어가는 벌판을 보면, 가슴이 넉넉하게 차 오르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게 농경민족의 DNA를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사람들이 황금색에 그토록 큰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가을 들판의 벼가 황금색으로 익어가기 때문일거야. 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남 장흥은 들이 넓은 고장이었다. 장흥 문학기행의 첫 인상은 이렇게 왔다.


■이 남녘 고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산에서 찾아간 독자들에게 시를 읊어주고 있는 소설가 한승원 씨.
이청준(2007년 작고) 한승원 송기숙. 색깔은 다르지만 다다른 높이 면에선 '한국 문단의 최고봉'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고향이 바로 장흥이다. 소설가 이승우와 시인이자 소설가 이대흠을 비롯해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은 넉넉잡아 100명이 넘는다는 것이 장흥군 사람들의 설명이다.

한국의 군(郡)이란 곳은 땅은 넓지만 사람들은 성글게 사는 농촌지대라 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이렇게 문학인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것은 '도대체 그 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문맥이 두터운가'하는 호기심을 발동시키고 남을 만큼 놀라운 현상이다. 장흥군은 이 점에 착안해 '문학'을 이 고장의 '특산'으로 내세워 차근차근 사업을 펼쳤고, 지식경제부는 여기에 호응해 지난해 장흥군을 전국 최초이자 유일한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했다.

경사스런 일에 잔치가 빠질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장흥군은 온 힘을 모아 제1회 전국문학인대회를 지난 18~19일 장흥군 일원에서 열었다. 우리는 궁금했다. 장흥에 어떤 '문학기행의 알짜'가 있기에 이 모든 일이 이어지는 것일까.

"고은 한승원 정진규 씨 등 문단의 어른들을 포함해 300명이 넘는 문인들이 장흥을 찾아 행사를 크게 잘 치렀다"고 전국문학인대회의 실무를 맡은 이대흠 시인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행사는 금요일(18일) 개막해 19일까지 이어졌고, 직장인과 학생 등이 많은 우리 문학기행 일행은 토요일(19일) 출발해 이튿날까지를 일정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흥청스런 전야제는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문학관광특구'라는 장흥의 속살을 파고 들어야 했다.


■점으로 박히고 선으로 이어진 문학명소들

지금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지만 장흥 출신으로 문명(文名)이 높은 시인이자 소설가 이대흠이 2007년 펴낸 빼어난 장편소설 '청앵'(실천문학사)을 읽으면서 장흥의 문맥이 두꺼운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도 사투리가 음악처럼 울려퍼지는 이 소설이 말하는 바를 요약하면 이렇다. '장흥은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의 열기가 대단했던 곳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에 잡힌 뒤에도 열기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전봉준이 잡힌 뒤 공세를 강화해 장흥관아를 점령하고 세를 넓혔다. 당연히 엄청난 탄압이 뒤따랐다. 일본군이 앞장 선 관군은 반격을 펼쳐 장흥을 점령하고 농민군 3만 명을 일시에 학살해버렸다'. 그 때 탄압의 기세가 얼마나 잔혹했던지 장흥은 그 뒤 3·1일 만세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터졌을 때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전국 8개 지역' 가운데 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 뒤 한국전쟁이 났을 때 장흥은 또 한 번 공포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한국 군경의 토벌과 여기에 대항하던 빨치산들이 엎치락 뒤치락 전투를 벌인 통에 장흥 군민들의 삶이 절단이 났던 것이다.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장흥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설가 이청준이 영화 '서편제'(감독 임권택)의 원작이 됐던 단편소설에 썼듯이 맺힌 게 없으면 뭔가 절실한 것을 토해낼 수 없고, 한이 없으면 판소리가 제대로 맺히지 못할 것이니 장흥의 아픈 역사는 오늘에 꽃으로 핀 장흥문학이 성장해오는 데 어떤 식으로든 거름이 됐을 것이다.

대도시 부산에서 온 사람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을 만큼 잘 지어놓은 장흥문화예술회관과 군민회관의 전시를 보는 것으로 장흥문학기행은 시작됐다. 절경의 천관산 가슴팍에 조성된 천관산문학공원, 수문리에 있는 소설가 한승원의 거처 해산토굴과 문학학교인 달 긷는 집, 이청준의 생가와 이청준 원작의 영화 '축제'의 촬영지 마을이 있는 용산 남포 일대, 탐진강을 따라 늘어서 있던 동백루와 부춘정 등의 빼어난 정자들, 가사문학의 중요한 발상지 중 한 곳인 기양사, 그리고 남도 특유의 품격과 친근한 맛이 살아있는 사찰 보림사. 장흥은 실로 발길 닿는 곳마다 문학이 서려 있었다.


■소설가 한승원의 "내 마음 속 거울 하나"

소설가 한승원은 장흥이 문학관광특구로 공인받을 수 있는 데 음으로 양으로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그가 고향마을로 돌아와 '해산토굴'이라는 집을 짓고 눌러앉자 이곳저곳에서 장흥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고 문학기념물들이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장흥군은 문학이라는 콘텐츠로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기거하며 글을 쓰고 있는 집의 이름이 해산토굴이고 바로 아랫채가 사랑채 격인 '달 긷는 집'이다. '달 긷는 집'은 장흥군청이 지어준 건물이다.

"내가 교사를 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가 교무실에 와서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른 선생님께 여쭤보니 이 아이가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손거울을 들고와 여교사의 치마밑을 비춰보는 개구장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이 아이의 가방에서 손거울이 나왔죠. 그래서 추궁했더니 이 아이는 완강히 부인하며 '꽃들을 위해서 거울을 갖고 다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묻자 아이가 들려준 사연은 이랬습니다. '꽃은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알 수가 없잖아요. 자기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꽃들을 보면 나는 손거울로 꽃들의 얼굴을 비춰주었어요. 그러면 꽃들 스스로 얼마나 예쁜지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굿 하러 다니고 점을 치던 그 아이의 할머니가 가르쳐준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승원은 그 때부터 "내 마음 속 거울 하나"를 간직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이날 문학기행에는 귀한 손님들이 있었다. 부산진중학교 김숙경 교장이 몸소 중학생 30여 명을 이끌고 참가했던 것이다. 말이 쉽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사춘기 학생들을 데리고 이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인가. 한승원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그 마음 속의 거울은 때가 잘 타요. 탐욕, 미움, 질시라는 때. 그럴 땐 거울을 닦아줘야 해요. 무엇으로 닦죠?" 무엇일까, 그 손수건은? 학생들을 염두에 둔 듯 그는 "네, 바로 책입니다"라고 답을 들려줬다.

어디 책뿐이랴? 거울을 닦을 도구는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중요한 건, 문향 가득한 장흥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문학인, 그런 마음을 되새길 수 있는 문학과 예술의 기억이 곳곳에 포도알처럼 맺혀있다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 장흥의 누런 들판을 다시 보며 이 고장을 '문학특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학기행 참가문의=동보서적 (051)803-8000 부산문화연구회 (051)441-0485 http://문학기행.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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