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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46>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정선의 산수화

구한말 러시아 사신에게 전해줬던 한약봉지가 박물관에 그대로

100년 지난 약초 아직 냄새 풍겨

정선의 그림 '분설담'도 소장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2-19 20:24:11
  •  |   본지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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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고고민족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구한말의 한약봉지. 한국에서 러시아로 가는 사신들을 위한 비상약으로 싸 준 것이다.
2002년 전국이 월드컵으로 떠들썩 했을 때에 필자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고고민족학박물관(쿤스트카메라)의 다락방에 쌓여있는 유물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해외소재 한국유물을 조사하는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실팀과 함께 3주간의 출장이었다. 설마 우리나라가 그렇게 잘하겠나 싶어서 출장일을 잡았었다. 물론 날짜를 그렇게 잡은 건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배웠으니 손해 본 건 없다. 18세기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룩한 표트르 대제가 세운 박물관인 쿤스트카메라는 독일어로 '예술의 방'이라는 말로 피터 대제가 전 세계에서 수집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수집해 놓은 것이 기반이 되었다. 올해로 29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쿤스트카메라에는 18세기 초부터 1950년대까지 외교관 민속학자 등이 다양한 경로로 수집한 한국의 유물 633점이 소장되어 있다.

쿤스트카메라에 소장된 유물은 대부분 구한말 한국의 운명이 위태할 때에 들어온 것이었다. 구한말 고종황제가 러시아에 거는 기대가 매우 컸고, 아관파천이라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어쨌든 당시에 러시아의 영사가 한국에 왔다 가면 한국에서는 우리나라의 독립에 러시아가 도움을 줄 것을 바라며 수많은 선물들을 주었다. 하지만 그 선물은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수천 ㎞를 날아와 이역만리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남겨졌다.

대부분의 유물은 민속 도자기 의복 등이었다. 비록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왔지만, 땅 파는 고고학만 좋아했지 미술사라면 질색을 하던 필자인지라 유물에 슬슬 싫증을 낼 무렵 흥미있는 유물을 발견했다. 바로 100여 년 전의 한약봉지였다. 시평탕 청서육화탕 통경탕 등 40여 가지의 약이 봉지별로 5~10개씩 낱개로 포장되어 있었다. 겉에는 정성스럽게 한문으로 약 제목이 써 있었고, 옆에는 곱게 정서한 러시아어로 약의 이름이며 그 효능이 적혀 있었다. 한문이지만 러시아어로 음차한 발음이 한국어발음이다. 즉, 한국의 약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니 한약(漢藥)이 아니라 한약(韓藥)인 셈이다. 한국에서 러시아로 먼 길을 떠나는 사신들이 장도에 아플까봐 비상약을 싸 준 것이다. 하나 하나 포장을 조심스럽게 풀어보니 그 약초의 색이 약간 바래기 했지만 100년이 지난 아직도 한약 특유의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고 너무 신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약 속에서 숨어있는 노리끼리한 감초 조각에서 단내가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한 조각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먼 길을 떠나는 러시아 사신의 안녕을 기원하며 한 봉지 한 봉지 정성을 담아서 넣었던 당시 의원의 정성이 느껴지는 듯했다.

또 당시 조사에서는 빠졌지만 쿤스트카메라에는 정선의 그림도 소장되어 있다. 1964년 러시아에서 발간된 논문에서는 정선의 그림이 소개되어 있다. 그림의 제목은 분설담(噴雪潭)으로 눈덮인 산속 계곡의 풍경이 그려진 것이다. 1952~1954년에 북한에서 일했던 한 러시아인이 기증한 것이다. 필자와 같이 일하던 쿤스트카메라의 학예사는 내가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왔다니까 이 그림의 진위가 궁금하다며 논문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미술사는 전혀 모르니 감정은 더더욱 못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안휘준 교수님의 미술사 수업을 잘 들을걸하는 후회와 함께 모르겠다고만 했다. 1964년 당시에는 전시관 한국실에 전시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필자가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은 한국-이탈리아전이 있던 날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 공항에서 러시아 사람들과 경기를 보고 있었다. 러시아는 예선 탈락한지라 다른 승객들도 나와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결국 경기 15분 전까지도 0 대 1로 지는 상태만을 보고는 스튜어디스들에게 거의 연행되다시피 끌려가서 마지막 탑승객으로 비행기를 탔다. 같이 비행기를 탄 어느 러시아인이 "그 정도면 괜찮다, 러시아팀은 예선탈락했다"며 건낸 보드카 한 잔을 받아먹고 쓰린 속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해서 김포에 오니 이미 시간은 그 다음날이 되었다. 공항에 내리니 직원이며 택시기사며 모두들 힘없이 풀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결국 졌구나하고 축구의 결과를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밤새 축하하며 놀아서 아침에 힘이 빠진 것이었다. 결국 필자는 독일, 터키와의 경기만 봤으니, 나만 보면 우리팀 진다는 징크스의 소유자가 된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케이블 텔레비젼에서 당시의 경기를 보노라면 쿤스트카메라 퀴퀴한 유물들이 쌓여있는 다락방이 떠오르곤 한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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