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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41> 200년전 러시아 신부 비추린, 한국고대사 대가로

"한국사의 시초는 고조선" 200여년전에 한국의 본질을 꿰뚫다

고구려·부여·옥저 등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저서에 번역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1-15 20:45:23
  •  |   본지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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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복장을 한 비추린 신부.
19세기 초엽 중국 북경의 저자거리를 오가던 한 러시아 신부가 있었다. 생김새마저 돌궐계 민족인 추바시 사람인 탓에 외모마저 동양적인 이 신부는 평소에 청나라 복장을 즐겨하며 천부적인 어학능력으로 만주어는 물론 몽골어, 중국어, 고대 한어, 여진어 등에 능통했다. 사람 좋고 술을 좋아해서 지인도 많았던 이 신부의 이름은 N. Ya. 비추린(1777~1853)이다. 그는 제9차 러시아정교회 북경사절단의 단장으로 1807~1821년 북경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방문한 사절단과도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비추린이 중국을 떠나 러시아로 오면서 고이 간직했던 편지 속에는 훗날 영의정을 지낸 조선의 사신인 조인영(趙寅永)이 보낸 편지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만 리나 떨어져 있다고 해도/우리는 같은 하늘 아닌가/그리운 때가 온다면/천마를 타고 가야지.

국경을 넘은 두 사람의 우정을 보여주는 얼마나 간결하며 아름다운 시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를 지은 조인영은 후에 영의정이 되어 풍양 조 씨의 세도정치를 주도하며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켜 가톨릭교를 탄압한 사람이다. 어찌보면 그만큼 보수적인 사람이 좋아할 정도로 비추린의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다는 뜻도 될 것이다. 하지만 비추린 신부의 진면목은 그의 뛰어난 한문 실력이 아니라 바로 한국 고대사의 연구에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아무리 만주를 자신의 역사로 만들려고 해도, 러시아 학계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한국을 비롯한 만주의 동이족들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로 서술한다. 바로 그 배경에는 200년 전 비추린의 연구가 있기 때문이다. 비추린은 수많은 역사와 관련한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1851년에 출판된 '중앙아시아 고대민족사료집'에는 중국 정사에 기록된 고조선, 고구려, 부여, 옥저, 동예 등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이 아주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비추린은 이 책에서 한국사의 처음으로 고조선을 서술했고 삼국이 성립된 이후 시기에는 말갈과 일본을 한국사에서 분리시켰다. 지금의 역사체계와 똑같다. 주변 국가가 한국역사를 자국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사방으로 홍보하는 요즘에 200여 년 전부터 한국사의 본질을 꿰뚫었던 비추린의 노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추린의 이야기를 하면 고대사 관련 학자들은 지금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한국 고대사의 기본사료들 조차도 영어나 다른 유럽어로 제대로 완역되지 못한 상황인데 무슨 말이냐며 농담하지 말라는 분위기다. 하지만 비추린은 한국뿐 아니라 몽골, 티베트, 중앙아시아에 대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 중 출판된 것은 극히 일부이다. 그의 육필원고를 뒤지면 아마 더 많은 한국관련 자료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비추린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94년으로 발해사를 전공하는 송기호 교수님의 대학원 수업을 통해서였다. 아직 러시아어를 몰랐던 탓에 중국어로 번역된 그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과연 200여 년 전에 이런 걸출한 인물이 나올 수 있었을까 반신반의했었다. 비추린 이후 러시아 사람들의 한국을 비롯한 동방학의 연구는 생각보다 엄청났었고, 필자는 중국어와 영어로 된 책들을 대조하면서 러시아 원 이름을 찾아내서 그 번역문을 학술지에 실었다. 필자로서는 학계에 최초로 데뷔한 글이었으니 이래저래 기억이 남는다. 이후 러시아로 유학을 와보니 한문을 전혀 모르는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고구려, 숙신, 말갈 등등의 고대 민족들의 이름이 거침없이 나오며 그들에 대한 기록도 자세히 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비추린의 번역 덕분이었다.

2001년 여름에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방문한 필자는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관람하고 네바강을 따라서 비추린이 밑거름이 되어 설립된 동방학연구소를 방문했다. 당시 러시아과학원은 경제적인 궁핍으로 연구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만 나올 뿐이었다. 텅 빈 한국과 중국학 연구실의 한쪽 벽에 청나라 관리의 옷을 입은 비추린의 사람 키 만한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엷은 미소를 띈 비추린은 마치 외롭게 시베리아와 북방 고대문화를 공부하는 나를 위로하는 듯 했고,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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