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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가 1760년 3월 16일 청계천 준설 사업을 마치고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준천시사열무도'와 청계천 준설사업을 한 영조 어진(작은 사진). |
2005년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 청계천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청계천이 복원된 후 지금까지 하루 평균 8만9000명 이상이 다녀갈 정도로, 청계천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가 가장 사랑하는 휴식처 중의 한 곳이 되었다.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햇빛을 보지 못하고 뚜껑이 덮여 있었던 청계천이 그 장막을 걷게 된 데는 문화와 환경과 같은 삶의 질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현대의 사회 분위기가 큰 작용을 하였다. 도심을 흐르는 하천은 많은 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고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지금부터 246년 전 조선후기 영조시대. 그 때도 청계천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원인은 서울로 밀려드는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배출하는 폐기물이 청계천에 몰리고, 근처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가면서 청계천의 흙들이 계속 쌓여만 갔기 때문이다. 큰 비라도 내린다면 서울 전 지역이 큰 홍수 피해를 입을 것이 확실하였다. 스스로 서민을 대변하는 국왕임을 표방한 영조가 본격적으로 청계천 공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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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복원된 서울 청계천 전경. 국제신문 자료사진 |
▲태종, 한양을 가로지르는 개천 공사에 착수하다
한양의 한 복판에 개천(청계천)을 처음 뚫은 왕은 태종이었다. 1405년 개성으로 옮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태종은 수도의 정비에 착수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개천, 즉 청계천 공사였다.
한양은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목멱산(남산),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모양의 구조 때문에 지리적으로 홍수에 취약하였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에서 흘러 들러온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홍수의 위협은 늘 존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태종은 도성을 가로 지르는 개천 공사에 들어갔다. 1406년 1월 16일 한성부의 정부(丁夫) 600명을 동원하여 개천을 팠고, 1412년 본격적으로 준천을 시행하였다.
태종은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여 이를 전담하게 하고 1412년 삼남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작업을 독려하였다. 1412년 2월 15일 마침내 하천을 파는 공사가 끝났다. 이때 완성된 수로는 대광통(大廣通:지금의 광교)에서 오간수문(지금의 흥인지문 근처)을 거쳐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현재의 청계천의 원형이 되었다. 태종은 "하천을 파는 일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다"라며 청계천 완성의 소감을 짧게 피력하였지만, 이 공사는 새로운 수도 한양의 팽창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실업자 구제와 홍수방지를 위한 청계천 공사
태종이 청계천을 건설한 후 350여 년이 지난 조선시대. 청계천의 중요성을 인식한 왕은 영조였다. 서민 군주임을 표방하며, 무명옷을 즐겨 입었다는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을 단행하여 조선의 정치,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다. 18세기 영조 시대는 조선후기 산업과 도시의 발달이 서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농촌 인구가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청계천 주변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움막을 짓고 살았고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심한 몸살을 앓았다. 땔감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근처 산림에 손을 댔다. 한양 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홍수 때에는 많은 흙들이 밀려와 청계천을 메웠다. 홍수에 대한 피해 우려는 전 시기보다 한층 심각해졌다. 문제점을 파악한 영조는 청계천의 공사를 명했다. 청계천 공사를 통해 홍수에 대비하고, 당시 도시로 유입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자 하였다. 홍수 피해 방지와 도시 실업자 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 한 정책이라고나 할까?
1760년(영조 36) 청계천 공사가 완성되기 전부터 영조는 준천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752년에는 친히 광통교에 행차하여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1758년 5월 2일에는 청계천 공사가 가능한 지의 여부를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구체적인 방안들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고, 1760년 마침내 준천 공사에 들어갔다. 준천 사업에 뜻을 둔 지 8년여 만의 결실이었다. 본격적인 청계천 공사는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어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57일간의 공사 기간에 21만5000여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한양의 일반 백성들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들과, 지방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승려,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000여 명에게는 품삯을 지급하였다. 대략 공사 기간 3만5000 냥의 돈과 쌀 2300여 석(石)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1760년 청계천 공사의 기록 '준천사실'과 '준천시사열무도'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에 대한 의지는 1760년 2월 23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 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 역점 사업을 청계천 공사에 두고 있음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영조는 특히 가장 어려운 공사 구간이었던 오간수문의 공사를 6일 만에 끝낸 사실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호조판서 홍봉한은 당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하였고 영조는 모든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매우 흡족해 하였다. 이처럼 영조대의 준천 사업은 국가적 사업으로 모든 백성들이 적극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760년 3월 16일 마침내 공사가 완성되고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이 편찬되었다. '준천사실'이라는 책의 제목은 영조가 직접 정하였다. 영조는 공사의 책임자인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100년을 갈 것입니다'고 하여 공사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였다. 이어 구선행 등이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標石)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고, 영조는 표석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게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되었음을 표시함과 함께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일 수 있게 하여 더 이상 청계천에 토사(土砂)가 쌓이지 않도록 하고, 만약 한 글자라도 파묻히면 후대의 왕들에게도 계속 준천할 것을 당부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청계천 공사기간 동안 영조는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친히 동대문에서 공사를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공사 완성을 기념하여 모화관에서 시험을 치르고 뽑힌 사람들을 시상하였다. 청계천 공사 완성의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일을 감독한 사람들을 인솔하여 연융대(鍊戎臺)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당시 영조가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어 당시 공사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 그림에는 당시 공사에 동원된 소와 수레, 쟁기 등을 비롯하여 영조가 동대문에서 관리들과 함께 친히 공사 현장을 목격한 모습 등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 청계천 준천사업의 의미
- 조선시대판 뉴딜정책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일컬어 균역법과 함께 '자신의 재위 기간 이룩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평가할 만큼 자부심을 보였다. 청계천 준천 사업을 추진하여 영조는 도성 내의 백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홍수의 위협을 해소시키고 일부 도시 실업자를 구제하는 면모를 보였다. 영조는 자신의 국정 방향에서 최우선으로 삼은 민본 사상을 청계천 준천 사업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이 사업은 1930년대 실업 문제 해결을 대토목 공사로 연결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떠올리게도 한다. 우리는 대개 세계사 수업 등을 통하여 1930년대 미국이 경제 위기에 빠졌을 때 루스벨트가 추진한 뉴딜 정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식을 갖고 있지만, 영조 때 대규모 청계천 공사가 이루어졌던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뉴딜 정책의 추진보다 무려 170년 전에 조선의 한 국왕에 의해 홍수 방지와 실업자 구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청계천 공사가 실시되고 성공적으로 완성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공사 현장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준천사실'과 '준천시사열무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