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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호마을 재롱둥이 솔이(7)가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를 재촉해 가며 산책에 나서고 있다. |
울산시 남구 야음1동 송호(松湖) 마을은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도시 속 집성촌이다.
남구 신정동 공업탑 로터리에서 삼산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2㎞정도 가면 울산역이 나온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우회전한 뒤 석유화학단지 쪽으로 500여m 가다보면 우측에 진입로가 나타난다.
이 길을 100여m 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노송 숲에 닿는다. 송호마을은 이 숲 뒤쪽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청송(靑松) 심씨(沈氏) 내금위공파(內禁衛公派) 후손들이 500년 넘게 살아온 곳이다.
지금은 주민들이 자꾸 빠져나가 18가구 5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 됐지만 도시화 바람이 불기 전인 1970년대만 하더라도 100여호를 헤아리는 규모를 자랑했다. 그래도 야음동을 500년 넘게 지켜오다 보니 '야음(也音) 심씨'로도 불린다.
슬레이트나 기와로 지붕을 얹은 가옥들 뒤쪽으로 삿갓봉, 롯데호텔과 백화점, 고층 아파트가 차례로 보인다. 이 곳이 도심 속 집성촌임을 증명하듯 말이다.
마을 주변이 자연녹지와 공원구역으로 지정된 탓에 송호마을은 현대화되지 않고 집성촌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청송 심씨 25세손인 심영자(65) 할머니는 "울산 한 복판에 같은 성씨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며 신기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한때는 농사가 짓기 싫어 이주할 뻔 했지만 지금은 선조들의 넋이 서린 이 곳에 뼈를 묻겠다는 일념뿐"이라고 말했다.
청송 심씨들은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암동과 북구 농소동 일원에서도 각각 소가구를 이루며 살고 있다.
울산 입향조는 시조 심홍부(沈洪孚)의 10세손으로 정4품 예문관(藝文館·한림원) 학사를 지낸 학사공 심광형(沈光衡)과 큰 아들 황(滉) 부자이다.
그들은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로 인해 지금의 돗질산(남구 여천동)으로 추정되는 목숙도란 곳에 유배됐다. 조선 왕조에서 3대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훈구파에 속한 학사공은 당시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려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미움을 사 내금위장(內禁衛將)이던 아들 황과 함께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학사공은 후일 중종 반정으로 복권됐지만 끝내 벼슬을 사양한 채 돗질산 아래 송호마을에 정착했다.
이들 부자의 묘소는 현재 송호마을과 인접한 울산시 남구 신정동 시리봉에 있으며 묘소 아래에는 재실인 갈현재(葛峴齋)가 자리잡았다.
입향조의 증손으로 울산향교 교수였던 환(渙)은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의병 활동으로 명성을 빛냈다. 그의 묘소는 송호마을 앞 야음동산에 있으며 임란공신을 추모하기 위해 울산시가 건립한 충의사에도 위패가 봉안됐다.
선조의 명성을 이어 후손들도 각계 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관계 인물로는 국회의원과 초대 울산광역시장을 지낸 심완구(沈完求) 전 시장, 심춘보(沈春輔) 전 안기부 관리관, 심부용(沈富龍) 전 울주군 부군수, 심수식(沈守植) 현 울산지방경찰청 보안과장, 심봉구(沈奉求) 전 경남도의원, 심규화(沈揆華) 현 시의원 등이 있다.
이밖에 심진구(沈璡求) 전 인천시교위의장, 심인보(沈仁輔) 부산대교수, 작고한 심영식(沈永植) 전 판사, 심완조(沈完祚) 덕원그룹회장, 심규수(沈揆秀) 한진그룹 이사, 심덕구(沈德求) 전 조흥은행 상무 등이 교육 법조 경제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