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백만(59)은 60년대말 한국야구를 호령하던 명투수였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때 부산으로 이사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축구를 했지만 부산남중에 진학해서야 야구에 입문한다.
당시 야구에는 워낙 문외한이어서 초등학교 6학년 체육시간에 칠판에 그려놓은 야구글러브를 그냥 ‘장갑’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백만이 이끈 부산상고는 전국 최정상 팀이었으나 전국무대 결승에서는 당시 백인천 이재환 오춘삼 등 호화멤버가 포진하고 있던 경동고에 번번이 정상문턱에서 좌절했다.
유백만의 기량이 만개한 것은 고교 졸업후 부터. 실업시절 유백만은 한국야구사에 유일무이한 대기록을 쌓는다. 실업야구 최다(4차례) 노히트 노런.
1963년 11월21일 대통령배 실업추계 연맹전에서 서울 철도청을 상대로 사사구 2개만 내주며 처음으로 대기록을 세운 유백만은 1969년 한전, 1970년 농협, 1971년 철도청 등을 상대로 차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고교시절 내야수였던 유백만이 실업팀에서 투수로 전향한 배경도 재미있다.
유백만은 고교졸업후 첫 직장을 부산 서구 토성동에 위치한 남전(현 한전)에 다녔는데 1961년 어느날 전국대회를 하루 앞두고 팀의 유일한 투수인 윤모 선수가 서울 농협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할수 없이 어깨가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투수가 됐다.
아무튼 유백만은 당시 엄청나게 빠른 볼을 던졌다.
유백만은 “당시 스피드건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적어도 최고구속이 147~148㎞는 나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백만은 이후 태극마크를 달고 1971년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 제패 등 큰 족적을 남긴뒤 1973년 유니폼을 벗고 그의 스승 장태영의 뒤를 이어 상업은행 2대 감독에 오른다. / 신수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