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홍길 전시관 출발 원점회귀
- 총거리 9㎞, 4시간가량 소요
- 문암산 정상 지나면 산성 만나
- 소가야 때 축성, 600m가량 남아
- 571m 정상 서면 남해안 한 눈에
- 하산길 8부 능선 거북바위 나와
- 아낙네 오르면 자손 번창 전해져
- 원효 창건 추정 장의사도 볼만
"저 산이 걸어간다!" 저녁 무렵 밥을 짓던 한 처녀가 부엌에서 나와 밖을 쳐다보니 큰 산이 성큼성큼 바다로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란 처녀는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저 산이 걸어간다"고 세 번 외쳤다. 그랬더니 산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고 한다. '한국의 마테호른'이라 불리는 경남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의 거류산(巨流山·571m)에 얽힌 전설이다. "별 희한한 전설도 다 있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 너머에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쓰였던 전설이라는 게 종잡을 수 없는 인생과 세상사처럼 오묘하다. 전설을 꼼꼼히 뜯어 보면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서린 고민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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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정상에서 바라본 당동만. 만의 형상이 한반도 지도와 흡사하다. 만의 북쪽에 보이는 섬이 거제시 가조도, 그 옆 작은 섬이 어의도다. |
인간과 역사를 이해하려면 사실과 허구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거류산 전설에서도 그런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산의 위치부터가 그렇다. 거류산은 하늘에서 떨어진 듯 드넓은 고성평야의 중앙에 종처럼 우뚝 솟아 있다. 서쪽은 고성평야, 북쪽은 당항만, 동쪽은 한반도 지도를 빼닮은 당동만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통영시와 경계를 이룬다. 전남 영암군의 월출산처럼 전라도 지방에는 평야에 홀로 솟은 산이 적잖은데, 거류산도 그런 산이다. 지세가 그렇다 보니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 같다. '당동만으로 걸어간다'는 전설이 만들어진 건 이곳 지세의 특성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산이 걸어가는 것을 발견한 이는 처녀가 아니라 할머니라는 설도 있다. 아예 처녀와 할머니를 통칭해 '아낙'이라고 한 설도 있다. 여기서는 하늘의 남성성에 대비해 땅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음양사상을 읽을 수 있다. 전쟁을 일삼는 남성의 대립·갈등 속에서 '잃어버릴 처지에 놓인(바다로 달아나는)' 땅을 여성이 지킨다는 전설의 스토리 설정은 생명의 보루로서의 여성성(모성)을 환기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떠난 집에서 어머니가 끝까지 자식을 먹이고 입히며 종족을 보존하듯, 뭇 생명이 버림받지 않도록 땅을 늘 감시하고 지킨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듬직하고 푸근한가.
고성은 소가야(小伽倻)가 있었던 곳이다. 소가야는 신라 유리왕 19년(42년)에 세워졌다가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거류산의 정상부에는 산성이 남아 있는데, 소가야가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한다. 거류산의 이런 역사에서도 삶 터를 사수하려는 고성인, 특히 고성 여성들의 억척스러운 노력을 상기할 수 있다. 거류산의 옛 이름은 유랑과 고난의 자취가 묻어나는 '유민산(流民山)'이다. '조선지도'와 '광여도'에는 유민산, '1872년 지방지도'엔 '거류산'으로 표기돼 있다. '걸어가던 산'이라 해서 '걸어산', '거리산(巨吏山)'이라고도 했다.
거류산 전설에 깃든 고성인들의 애환을 생각하며 산에 오른다. 산행은 엄홍길 전시관을 출발해 문암산 정상(459m)과 거류산 정상, 거북바위를 거쳐 기점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총거리는 약 9㎞로 4시간가량 걸린다. 엄홍길 전시관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로 500m가량 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직진해 문암산을 향해 자드락길을 오른다. 40분가량 약 1.7㎞의 외길을 따라 걸으면 문암산 정상에 닿는다. 여기서 거류산 정상 쪽으로 20분쯤 가면 삼거리를 만난다. 삼거리에서부터 거류산성을 끼고 거류산 정상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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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성. |
거류산성은 정상부에서 서쪽 경사면을 성내로 하여 계곡과 산정을 두르는 형태로 축조된 포곡성(包谷城)이다. 성벽은 현재 600m가량 남아 있는데,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규모는 둘레 1.4㎞, 높이 3m, 너비 4m 정도다. 성벽은 주로 자연암반으로 된 절벽을 이용하고 그 사이에 산돌을 쌓았다. 성안을 서쪽에 두었는데, 이는 동·남·북쪽의 바다를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소가야 때 세웠다고 하지만 형태와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성곽으로 보이며, 왜구의 침략 방비용인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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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정상의 소사나무. |
삼거리에서 300m가량 오르면 거류산 정상에 이른다. 정상에 서면 한반도 형상의 당동만이 눈에 들어온다. 다소곳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당동리 마을들의 풍경이 정겹고 평화롭다. 만의 위쪽 중앙과 왼편으로 가조도를 비롯한 거제시의 섬들이 펼쳐져 있고, 멀리 오른편으로 부산시 가덕도가 보인다. 당동만이 한반도라고 가정하면 가조도는 연해주, 가덕도는 요동반도에 해당한다. 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승전한 당항포와 통영 욕지도와 사량도 등 360도 파노라마 절경을 조망할 수 있다. 정상에는 수령이 300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사나무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모진 비바람에도 꿋꿋이 가녀린 가지를 공중으로 뻗은 이 나무에서 고성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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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거북바위.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 모습이다. |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하산한다. 400m가량 내려가면 거북바위가 나온다. 8부 능선에 있는 이 바위는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 것 같은 형상인데, 아낙네가 여기에 오르면 자손의 번창과 장수, 재물운이 따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거북바위에서 600m가량 가면 사거리가, 이곳에서 200m가량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두 곳 모두에서 엄홍길 전시관 쪽으로 길을 잡는다. 이후 약 1.6㎞ 거리에서 삼거리 두 곳을 또 만나는데 역시 전시관 쪽으로 진행한다. 마지막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100m가량 가면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의사가 있다. 장의사에 이르는 길가에 쌓아 둔 10여 개의 돌탑이 눈길을 끈다. 마지막 삼거리에서 전시관 쪽으로 10분쯤 걸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다 10분쯤 후 또 만나는 갈림에서는 오른쪽으로 하산하면 산행 초기 거쳤던 전시관 위 사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왔던 길을 되밟아 전시관으로 회귀한다.
◆떠나기 전에
- 엄홍길 전시관 '히말라야 이야기' 가득
- 횟집단지 많아 먹을거리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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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엄홍길 전시관. |
엄홍길 전시관은 고성 출신의 산악인 엄홍길(55)이 해발 8000m 이상의 세계 고산 16좌를 완등한 것을 기려 2007년 개관했다.
엄홍길은 고성군 영현면에서 태어났는데, 1985년부터 23년 동안 에베레스트·초오유 등 히말라야 14개 고봉과 얄룽캉·로체샤르를 포함한 16좌에 모두 올랐다. 전시관은 1만7347㎡의 대지에 664㎡ 규모의 단층 건물로 지어졌다.
내부는 엄홍길의 성장 과정과 발자취를 담은 '산사나이 엄홍길', 히말라야를 소개한 '신의 영역 히말라야', 16좌 등정 과정을 설명한 '16좌 완등의 신화', 등반 및 설산의 위험과 조난에 대해 다룬 '함께가는 히말라야', 고성의 10대 명산을 알리는 코너 등 5곳으로 나누어 꾸몄다. 16좌 완등 때 사용했던 등산텐트와 산소마스크 등 108점의 물품을 전시해 놓았다. 전시관 관람시간은 동절기에는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 하절기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관람료는 무료다. 매년 5월에는 엄홍길과 함께하는 등산축제도 열고 있다. 문의 (055)673-2296
고성에는 봄 도다리, 여름 하모, 가을 전어와 대하, 겨울 대구 등 철 따라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남포·임포·당항·거류·당동 등 횟집단지도 즐비하다. 고성읍에서는 1, 6일 고성장이 열린다.
◆교통편
- 통영행 시외버스 타고 고성으로
- 장좌행 버스 갈아타 마동서 하차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통영행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고성터미널에서 내린다. 서부터미널에서 통영행 버스는 오전 5시40분에 출발하는 첫차를 비롯해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이어 고성터미널 내 버스정류장에서 장좌행 농어촌버스를 갈아탄 뒤 마동 정류장에서 내려 약 820m가량 걸어가 이번 산행 출발지인 엄홍길 전시관에 닿는다.
문의=생활레저부 (051)500-5147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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