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규슈 오이타현 해발 1787m 구주산 3시간30분 코스
- 정신지체·지적 장애우 8명에겐 에베레스트 보다 힘든 여정길
- 다치지 않게 보조할 자원봉사자들과 2인1조로 동행

- 미끄러운 토산토, 너덜너덜한 길에
- 발에 물집 생기고 다리 아파 울면서도 절대 포기 안해

- 힘겨운 발걸음에 일몰 시각 다가와 정상 못 밟은 이는 하염없이 눈물 흘려
- 야간산행 끝에 6시간 만에 무사귀환… "고마워, 사랑해" 참가자들 한목소리

	부산장애우합동원정대 대원들이 일본 구주산 정상에서 마지막 정상 등정 장애우인 강유진씨와 자원봉사자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내고 있다.(위 사진) 지적뇌병변장애 3급인 박신자 씨가 구주산에서 하산 도중 체력이 급격히 소진되자 신인식 대한산악연맹 경기심판위원장의 등에 업혀 내려오고 있다.

"유진아 힘내! 그래 잘한다. 한 걸음만, 조금만 더."

지난 6일 오후 4시 일본 규슈 오이타현 구주산(구주산·1787m) 정상에 모여 있던 부산 산악인들이 이제 막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한 20대 초반의 아가씨를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올해 스물네 살의 지적장애 2급 장애우 강유진 씨. 신체는 어른이지만 정신 연령은 유치원생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장애우다. 30m, 20m, 10m…. 정상 표지목이 가까워질수록, 꿈에도 생각지 못한 높은 산에 난생 처음 스스로 오르고 있는 유진 씨의 표정은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며 시시각각 변했다. 자원봉사자로서 2시간30분 동안 편도 5㎞의 산행길을 유진 씨와 함께 한 배형주(여·34) 씨와 부산시산악연맹 산하 산악구조대 김형기 대원도 그녀에게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은 채 바짝 긴장했다.

"3m, 2m, 1m… 골인". 마침내 유진 씨가 마지막으로 정상에 도착함으로써 총 8명의 장애우 원정대원 가운데 6명이 목표를 달성했다. 조금 먼저 와서 기다리던 성은하(여·26) 유철민(33) 최용길(27) 이향숙(여·25) 오성민(23) 씨 등 5명의 동료 장애우들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눈물 글썽이는 유진씨를 얼싸안았다. 그들과 함께 "유진아, 힘내!"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최금식 회장, 김경섭 원정대 총산행대장, 이갑룡 조직부회장 등 부산시산악연맹 임원진과 가맹단체 관계자, 자원봉사자, 구조대원 등 60여 명도 감격에 겨워 서로 껴안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울다가 웃었고, 웃다가 울었다.

	지적장애우인 강유진 씨가 구주산 등반중 돌무더기를 만나자 자신도 돌 하나를 얹고 소원을 빌고 있다.(위 사진) 지적장애 2급인 성은하 씨가 구주산대피소를 향해 가던 중 발에 경련이 일어나자 자원봉사자인 장호일 씨(왼쪽)와 황애자 씨가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다.

대한민국 개척산행의 효시 국제신문 산행시리즈 '근교산&그 너머'가 연재 14년11개월 만에 700회째를 맞았다. 취재팀은 700회를 기념해 부산시산악연맹과 함께 지난 5~7일 특집 산행을 진행했다. 20~30대 지적 장애우 8명과 함께 일본의 구주산으로 떠난 2박3일 동안의 '아주 특별한 산행'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도전, 위대한 극복'이라는 프로젝트 명이 붙여진 이번 기념 산행에는 장애우 8명과 인솔교사 및 후원회 관계자 6명, 부산산악연맹 임원진과 구조대원, 자원봉사자, 가맹단체 회원 등 총 95명이 동행했다. 장애우들도 산행을 통한 도전정신을 기르고 성취감을 맛보게 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더 큰 희망의 빛을 키울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산행의 작지만 소중한 목적이다. 나아가 비장애인들에게도 마음 속 편견과 무지의 벽을 허물고 비로소 약자와 강자가 하나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나눔과 배려 그리고 봉사가 충만한 진정 아름다운 세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중학교 1학년생 아들과 40대 후반의 아버지로 이뤄진 부자(父子)도 있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1700m대 산에 오른다는 아가씨도 있었다. 또 부산 상봉산악회에서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주부 산꾼도 있었으며 부산등산학교 등에서 시민들에게 산행 기술과 지식을 가르쳐 주는 강사도 있었다. 그들의 동작 하나 하나에는 사랑과 희생이 충만했다.

원정대원으로 선발된 장애우 8명은 지능이 낮아서 스스로 살아갈 자활 능력이 부족하고 생활도 궁핍한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이다. 외국여행 경험은 물론이고 성지곡 수원지 숲길을 걷는 정도의 활동을 제외하면 산행 경험도 전무하다. 하지만 자원봉사자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정상에 오르고야 말겠다는 열망 하나 만은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다.

지난 700회 동안 대한민국 일간지 최장수 시리즈이자 최고의 '개척산행 길잡이'를 자임해 온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에게도 이번 산행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동안 총 거리만 약 8400㎞, 부산~서울 10회 왕복할 만한 거리이자 직선으로 그었을 때 부산에서 스위스 알프스산맥까지 갈 수 있는 거리만큼 취재 산행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건강한 다수를 위한 것이었다. 단 한 차례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배려한 산행을 한 일이 없었다는 점이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번 산행에 나선 한 장애우가 산행을 마친 후 "비행기 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라고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커다랗게 쌓여있던 '부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앞으로 1000회를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취재팀과 근교산 시리즈에게는 독자와 함께 지평의 확대를 꾀할 수 있는 크나큰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자 그럼 떠나보자. 누군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비행(飛行)'이었던 그 특별했던 산행 속으로.


"정말 올라갈 수 있겠어? 할 수 있어?" "그래. 자신 있다. …. 나 막지마. 반드시 꼭대기까지 갈거야. 그런데 배 타는 것 재미있다. 처음인데…. 히히." "그래, 자신있다고 했지. 약속 지켜야해. 오빠만 믿고 함께 가자. 알았지." 지난 5일 밤 10시께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을 출발, 일본 규슈의 모지항으로 향하는 대형 여객선 세코마루(seco-maru)호의 선내 이곳저곳에선 이 같은 대화가 오갔다. 국제신문 '근교산&그 너머' 700회를 기념하고 부산시산악연맹 창립 41주년 축하도 겸해 마련된 '아름다운 도전 위대한 극복-장애우와 함께하는 일본 구주산 합동원정대'에 포함된 장애우들과 자원봉사자들간의 대화다.

자원봉사자들이 장애우와의 산행을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 하지만 이내 돌아오는 장애우 대원들의 간절하면서도 시원한 대답을 들으며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다.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주며 용기를 북돋운다. 장애우 대원들은 자원봉사자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크루즈여행의 재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사실 해발 1787m인 일본 규슈 오이타현 소재 구주산(久住山)은 설악산(1708m)보다도 키가 큰, '꽤 높은' 산이다. 봄 철쭉과 가을 억새와 단풍이 아름다운 이 산은 부산서 가까워 5~6년 전부터 부산 산꾼들도 꾸준히 찾는다. 높이에 비해 산행시간도 짧고 산길도 별로 험하지 않다. 대부분 산꾼들은 해발 1330m인 마키노토 등산로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코스 선택 여부에 따라 짧으면 4시간, 길면 7시간 정도면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정상인의 경우다. 정신지체 또는 지적·뇌병변장애를 가진 8명(남 4명, 여 4명)의 장애우들과 함께 산행을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다음날인 6일 오전 7시 일본 모지항에 도착한 세코마루호에서 지루한 기다림 끝에 하선을 완료한 시각은 오전 10시. 곧바로 전세버스편으로 갈아타고 약 3시간 여를 달려 구주산 산행기점인 마키노토에 도착했다.

■부딪쳐 보는거야, 모든 도전은 아름답잖아

	지적장애우인 성은하 씨가 구주산 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면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위 사진) '근교산&그 너머' 700회 기념 산행에 참가한 장애우와 자원봉사자 및 부산산악연맹 관계자들이 구주산 정상에서 성공적인 등정을 자축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후 1시. 드디어 본격적인 산행 준비에 들어간다. 하늘도 도왔는지 날씨는 쾌청하다. 코스는 마키노토에서 대피소를 거쳐 구주산 정상까지 다녀오는 단일코스로 정해졌다. 도상거리 9㎞, 실제 걷는 거리는 10㎞가량으로 정상인이라면 3시간30분~4시간쯤 걸린다. 미리 정해진대로 자원봉사자들이 2인1조로 나뉘어 장애우들 곁에 섰다. 비교적 신체 건강한 나머지 7명과 달리 양쪽 다리 길이가 다르고 걸음걸이가 부정확하며 오른손까지 불편한 박신자(여·32·지적뇌병변 장애 3급) 씨에게는 특별 조치가 취해졌다. 총괄 원정대장인 김경섭 부산산악연맹 수석부회장의 지시에 따라 김희수 부산산악구조대장과 민유돈 박정숙 대원 등 전문 구조요원 3명이 밀착 보호토록 한 것. 박 씨는 이번 원정대에 함께 참가한 오세철(36·정신지체 3급) 씨와 4년전 결혼한 주부다. 유일한 장애우 부부다. 신체가 비교적 건강한 오씨는 아내 박씨가 염려스러운 듯, 절대 떨어지지 않을 기세다.

김 대장의 출발 신호에 맞춰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본격적인 악전고투가 시작된 것이다. 출발 10분 후 전망대를 지날 무렵부터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8명 중에는 장애인 수영선수 출신인 최용길(27) 씨와 올해 장애인 전국체전 볼링 부산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딴 유철민(33) 씨도 포함돼 있었다. 그나마 이들 2명만 자원봉사자들의 큰 도움 없이 산행을 할 수 있을 만한 체력이 될 뿐, 나머지 대원들은 초반 가파른 오르막에서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적장애를 가진 성은하(26) 이향숙(25) 강유진(24) 씨는 그나마 이를 악물고 나아갔지만 원래 걸음걸이가 불편한 박신자 씨가 가장 많이 힘겨워한다.

김희수 구조대장 등 3명의 자원봉사자가 곁에서 보조를 맞추지만 몇 걸음 딛을 때마다 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하지만 박 씨는 "그래도 갈 수 있어. 가는 데까지는 가 볼거야"라며 여전히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다. 힘겹게 구츠가케산 기슭을 넘어 오른쪽 멀리 오우기가하나(1698m)가 훤히 드러나는 능선길로 접어들 때까지 박 씨는 자신과의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남편 오 씨는 아내가 힘겨워하는 모습을 몇 걸음 뒤에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신자야, 힘내라. 너무 힘들면 나한테 말해라. 내가 업어줄게". 오 씨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마른침을 삼키며 연신 애타게 말을 건다. 분명히 정상인에 비해 사리분별 능력이 떨어지는 오 씨지만 그는 한 여인의 당당한 남편이고 가장이었다. 오 씨가 걱정스러운 말을 던질 때마다 아내 박 씨는 "나는 괜찮다. 너나 조심해라"라며 면박을 준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에는 육체적 고난은 아랑곳없다는 듯 가을 햇살보다 더 빛나는 '행복의 미소'가 샘솟는다. 그녀를 보조하던 김희수 구조대장은 "이들의 표정과 눈빛, 대화가 너무도 순수하고 해맑아 오히려 우리들이 배운다"며 "다치지 않게 보좌만 할 뿐 최대한 자신의 의지로 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싶다. 자신과의 싸움에 도전하는 것이니까. 모든 도전은 아름다우니까"라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극복할 수 있다

박 씨가 악전고투 하고 있는 사이, 조금 앞서가던 성은하 씨가 발이 아프다며 주저 앉는다. 자원봉사자로 나선 2명의 부산등산학교 장호일 황애자 강사가 급히 등산화와 양말을 벗기고 상처난 곳을 치료한다. "발 아파 못 가겠어". 성 씨가 어리광 섞인 울음을 터뜨리자 장호일 강사가 "그럼 여기서 포기할래?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해도 돼. 하지만 치료하고 마사지하면 다시 걸을 수 있어, 어쩔래?"라고 되물었다. 그제서야 성 씨는 "아냐, 포기 안 할래. 갈 수 있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다시 걷는다.

성 씨보다 조금 더 앞서가던 강유진 씨는 능선길에서 돌무덤을 만나자 자기도 돌 하나를 올려놓고 소원을 빈다. 보조자인 김형기 배형주 씨가 동시에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묻자 강 씨는 "좋아하는 오빠와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한다. 장애우들은 어쩌면 더 외롭고 더 힘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을 더 많이 갈구할 지도 모르겠다. 자원봉사자로서 동행하던 김 씨와 배씨가 순간 숙연해한다.

출발 후 2시간30분이 지났다. 박신자 오세철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중간 기착지인 구주산대피소에 도착해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했다. 이러다가 야간산행까지 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일행의 발길을 서두르게 한다. 이제 정상까지는 30분. 그런데 이번에는 강유진 씨가 발에 물집이 생겼다며 주저앉아 버렸다. 구조대원이기도한 김형기 씨가 응급조치를 하고 다시 출발한다. "유진아 포기할 수 없잖아. 오빠랑 함께 가자."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 장애우 대원들의 등 뒤로 화산 분화구에서 솟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강 씨가 응급조치를 받는 사이 성은하 씨가 먼저 정상에 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강유진 씨 한 명. 이미 김경섭 총괄 산행대장이 오 씨와 박 씨 부부는 대피소까지만 산행하고 다시 하산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다. 일몰 시각을 고려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강유진 씨가 정상에 오르자 정상에 모여있던 모든 원정대원들이 환호했다.

■야간산행 끝에 무사 귀환…"고맙고 기쁘고 사랑해요"

	지적장애우 성은하(보라색 자켓) 씨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구주산대피소 인근 너덜길을 통과하고 있다.

장애우들의 산행은 하산할 때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 김 대장이 서둘러 하산을 명했다. 자원봉사자들과 장애우들을 제외한 대원들은 전속력으로 하산하고, 남은 사람들은 야간산행도 각오하기로 했다. 미끄러운 화산토와 너덜길이 갈길 바쁜 장애우들을 붙잡는다. 결국 30분 만에 대피소를 지나고 거대한 바위고개를 넘어 평원지대를 통과할 무렵 사위가 급격히 어두워진다. 자연스럽게 야간산행이 시작됐다. 저마다 헤드랜턴과 후레시를 켜고 발길을 재촉한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대피소까지만 올라 하산 중이던 박신자 씨가 더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탈진한 상태에 처했다. 구조대는 박 씨를 업기로 했다. 그녀를 업지 않으면 나머지 일행의 하산 속도도 그만큼 늦어질 수 밖에 없다. 부산산악연맹 전 산악구조대장을 역임했던 대한산악연맹 경기심판위원장 신인식 씨가 나서 '구조용 슬링'을 착용한 채 그녀를 업었다. 이제 진행 속도가 조금씩 더 빨라졌다. 남편 오세철 씨도 업힌 채 가고 있는 아내 뒤를 바짝 쫓아간다. 먼저 하산한 본부대와 현재 상황에 대해 수시로 교신하던 김희수 대장과 이태곤 부산등산학교 강사가 신 위원장과 교대로 박 씨를 업고 걸음을 재촉했다. 구츠가케산을 넘을 때 길이 좋은 전망대까지 다다르자 박 씨는 다시 자신의 발로 걷기로 했다. 마지막 하산 지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모든 일행들에게 업힌 채 내려오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발로 걸어서 내려서겠다는 것은 구조대원들조차 지켜주어야할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박씨는 하산 후에 "정상에 꼭 가고 싶었는데…"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모두가 그녀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오후 6시50분 오성민(23·지적장애 2급) 씨와 성은하 이향숙 강유진 씨 등 나머지 대원들도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어둠을 뚫고 무사히 하산했다. 6시간 동안의 '아름다운 도전'은 비록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구조대의 희생과 협력이 있었지만 결국 장애우 자신들의 강한 의지로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산행 내내 장애우 이향숙 씨와 동행했던 주부 자원봉사자 조순자 씨(상봉산악회 총무)는 하산 후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일반인들보다 몇 배는 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장애우 대원들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자 성은하 씨가 나서서 "오늘 하루 아팠지만 즐거웠고 기뻤고 너무 고마웠다. 오빠, 언니들 사랑해요"라고 화답했다. 오성민 씨와 동행했던 자원봉사자 정영목 씨는 "오늘 우리는 해발 1787m짜리 산을 올랐지만 장애우 친구들에게는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든 여정이었을 것이고, 기쁨도 더 컸을 것"이라며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밝혔다.



◇ 자원봉사자·후원인들

- 고마워요 사랑해요 당신들이 있어서 하늘에 오를 수 있었어요

"봉사(奉仕)를 실천하는 것, 사실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나보다 어렵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이 진정한 행복 세상이라는 생각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국제신문 '근교산&그 너머' 700회 특집으로 마련된 '아름다운 도전 위대한 극복-장애우와 함께하는 아주 특별한 산행'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들과 평소에도 장애우 후원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동행 후원인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다. 사실 국내의 산도 아니고 일본 규슈의 구주산(1787m)을 장애우 8명과 함께 오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준 이들 자원봉사자들과 (사)한마음장애인후원회 관계자들이 있었기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애우들의 '아름다운 도전'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부산산악연맹 산하 산악구조대원, 부산등산학교 강사 등 비교적 전문가급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순수한 일반인으로서 선뜻 봉사에 나선 사람들의 한결같은 희생이 있어 더욱 빛을 발했다. 또 한마음장애인후원회의 전진호 회장(45·한마음꽃집 대표)과 도경희 이사, 최혜은 간사 등 후원인들은 직접적인 산행뿐 아니라 장애우들의 출발 준비부터 선박과 버스에서의 이동중 도움 및 보호, 숙소에서의 각종 불편사항 해소까지 궂은 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봉사와 후원의 참다운 실천을 보여줘 일반 참가자들에게 큰 감명을 줬다


■(사) 한마음장애인후원회 전진호 회장

- 장애우들에 아버지 어머니 역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자원봉사자인 배형주 씨(오른쪽)가 구주산 정상 부근 너덜지대에서 지적장애우 강유진 씨를 이끌어 주고 있다. (위 사진) (사)한마음장애인후원회의 김진호 이사와 최혜은 간사, 전진호 회장(왼쪽 두번째부터)이 세코마루호에서 포즈를 취했다.

전진호 회장은 자신이 불과 22세 때이던 1987년 부산장애인축구부를 창설한 이후 23년째 장애우 후원에 헌신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져 큰 감명을 주었다. 자신이 조그마한 꽃집을 운영하고 있기도 한 전 회장은 부산 지역의 많은 장애우와 후원인들로부터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남자'로 불린다. 그는 부산장애인축구부 창설을 계기로 '평화의 집', '성우재활원' 등 장애우 축구팀들과 일반 직장인 축구부팀들이 참가하는 축구 리그도 만들어 장애우와 일반인의 간극을 좁히고 장애우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는 데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또 매주 주말마다 장애우들에게 볼링 교실, 등산, 축구 교실, 용두산공원 급식 봉사 등을 번갈아 진행하고 있다. 오세철 박신자 부부를 비롯한 장애인끼리의 결혼 주선, 축구 리그에 참가한 일반 직장팀을 통해 그들의 회사에 장애우 취업시키기 활동 등을 꾸준히 펼치느라 아직 결혼할 틈도 없었다는 그는 미혼이지만 부모 없는 장애우 결혼식에서는 부모의 자리에 앉기도 한다. 그래서 전 회장은 장애우들로부터 '아버지' 또는 '큰 형님'으로 통한다. 이번 산행에서도 참가 장애우들의 선정에서부터 귀국 후 귀가하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실천했다.

전 회장은 "너무 어렵게 자란 탓에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을 뿐"이라며 "이번에 난생 처음 높은 산에 도전하는 친구들이어서 걱정도 많이 했지만 믿어지지 않는 의지력으로 대부분 잘 오르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원봉사자들과 구조대원, 부산산악연맹 관계자, 국제신문 근교산 취재팀 등에도 너무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덧붙였다. 아울러서 전 회장은 "이번 산행에 동행해 더 많은 궂은 일을 도맡아준 한마음장애인 '후원회의 살림꾼' 최혜은 간사와 벌써 18년째 우리들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이번에 최용길 군의 자원봉사자 역할까지 해 주신 김진호 산용산악회 부회장께도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최혜은 간사는 "처음에는 과연 다른 산악인 분들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봉사를 해 주실지 의문이 들었는데 실제로 함께 산행을 해 보니 생각치도 못했던 과분한 헌신을 보여줘 오히려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장애우들을 볼 때 너무 편견을 갖지 말고 그저 일반인보다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친구들로 봐 주시고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일반 봉사자 배형주 조순자씨·김영근 김택상 부자

- 꿈만 같던 6시간, 장애우들 인도해 준 친구이자 그림자

	김영근(오른쪽) 씨와 아들 택상(앞쪽) 군이 장애우 유철민 씨와 함께 일본 구주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위 사진) 조순자 씨(왼쪽)가 이향숙 씨와 구주산에서 하산중이다.

이번 산행에서는 부산산악연맹이나 장애인후원회, 재활원 등과 특별한 인연도 없으면서 선뜻 장애우들의 안전 산행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겠다며 나선 사람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지적장애우인 강유진 이향숙 씨의 보조자로 각각 나선 배형주 씨와 조순자 씨의 '조용한 봉사'도 빼놓을 수 없다.

산행을 별로 많이 하지 않았다는 배 씨는 아버지인 배기성 씨와 함께 참가했다가 선뜻 장애우 도우미로 나선 고마운 사람이다. 배 씨는 왕복 10㎞에 달하는 산행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한시도 강유진 씨를 떠나지 않고 근접 보호를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산행 전문가들로부터 "과연 이런 일을 처음하는 것이 맞느냐"는 칭송을 받았다. 배 씨는 "처음에는 많이 긴장한 것이 사실이지만 진심어린 마음으로 함께 걷다보니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다. 봉사라는 것은 특별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부산 상봉산악회 조순자 총무도 다정다감한 밀착 보호를 통해 장애우 산행 도우미로서의 숨은 능력을 발휘했다. 산행 내내 이향숙 씨의 손을 잡고 걸었던 조 씨는 "향숙 씨를 비롯한 장애우들이 실제 나이와는 너무 다르게 순수하고 해맑아 오히려 내가 많이 배웠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데로 봉사에 나설 생각이다"고 말했다.

이와 별도로 산용산악회 회원인 김영근 씨는 자신의 중학생 아들인 택상(대천리중 1년) 군과 조를 이뤄 지적장애우인 유철민 씨의 봉사자로 나서 '부자 도우미'로 화제가 됐다. 김 씨는 "철민 씨가 전국체전 볼링 금메달리스트답게 아주 잘 걸어 별로 힘들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나눔과 배려 봉사의 정신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참을 제안했는데 선뜻 동의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택상 군은 "별로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다"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사)한마음장애인후원회의 오랜 후원자이자 최용길 씨의 도우미로 나섰던 김진호(부산스텐 대표) 씨는 "장애우 친구들이 정말 열심히 산행을 해줘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도 건강하고 활기차게 생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장애우들에 대한 진한 애정을 대변했다.


◇ 인터뷰- 김경섭 총괄 산행대장

- "탈진 직전 박신자 씨 정상 500m 남기고 하산 조치… 내 가슴도 울었다"
- 95명 대부대 안전 책임 맡은 베테랑 산악인
- 위기마다 빠른 판단과 조치 산행 성공 산파

"아무런 사고 없이 안전하게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스럽다. 모든 참가자들이 산행대장의 지시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지여 준 덕분이다."

이번 일본 구주산 특집 산행에서 95명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을 이끈 김경섭(56) 총괄 산행대장. 부산산악연맹 수석부회장이기도 한 김 대장은 부산의 웬만한 산꾼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부산을 대표하는 산악인 중 한 명이다.

총괄 산행대장으로서 가장 큰 신경을 쓴 부분에 대해 그는 "안전한 산행이 가장 중요했는데, 출발때부터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바람에 피치못하게 야간산행을 할 각오를 하니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번 구주산 산행이 별다른 사고나 부상자 없이 완벽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보이지 않는 그의 세심한 배려와 판단이 톡톡히 한몫했다.

우선 그는 다리 길이가 달라 걸음걸이가 불편한 지적뇌병변장애우 박신자 씨에게는 특별히 연맹 소속 산악구조대원 3명을 배치해 각별한 신경을 쓰도록 했다. 그의 예상대로 박 씨의 산행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자 무선교신을 통해 김희수 산악구조대장에게 구주산대피소까지만 오르고 다시 하산토록 지시, 그나마 박씨가 안전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 김 대장은 "박 씨 본인도 정상까지 불과 500m를 남겨두고 돌아서기가 아쉬웠겠지만 나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오랜 산행 경험으로 미뤄볼 때 스스로 이겨내기에는 박 씨의 당시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산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 대장의 판단력은 야간산행에서도 빛났다. 김 대장은 오후 4시가 가까워지자 야간산행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 미리 정상에 올라있던 일반 참가자들에게 가지고 있던 헤드랜턴과 플레시를 꺼내 놓고 먼저 전속력으로 하산하라고 지시했다. 장애우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어차피 어둠 속에서 하산을 해야하므로 불빛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또한 어두워질 경우 전체 대원들의 원활한 하산을 위해 무조건 박신자 씨를 업도록 구조대원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일단 먼저 하산해서 야간산행 하산자들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김 대장은 수시로 김희수 구조대장과 무선교신을 하며 현재 위치와 진행 상태 등을 점검하며 기다리다 마지막 하산자까지 안전하게 출발지인 마키노토 주차장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한산악연맹의 경기심판위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하기도 했던 김 대장은 "산악인들이 장애우들에게 더 많은 애정과 배려를 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주기 바라고 산 앞에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겸손한 사람들이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최금식 원정대장과 이갑룡 조직부회장, 김병근 조직이사 등 이번 특집 산행을 준비하느라 애쓴 많은 부산산악연맹 관계자 및 부산시, 몽벨, 콜핑 등의 기관과 기업체에 대한 감사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김 대장은 "국제신문 '근교산&그 너머' 시리즈는 숨겨져 있던 알짜배기 산행코스를 발굴, 소개함으로써 부산 울산 경남 산악인들의 산악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력이 아주 크다.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산악인들의 친절하고 다정한 친구로 남아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아래 사진 설명 : '근교산&그 너머' 700회 특집 산행에 나선 지적뇌병변 장애우 박신자 씨(노란 모자)가 지난 6일 일본 오이타현 구주산에서 부산산악구조대 대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박 씨의 뒤에 바짝 붙어서 걷는 이는 그녀의 남편이자 정신지체 장애우인 오세철 씨. 아내의 안전을 염려하는 듯한 안타까운 눈빛이 역력하다.(왼쪽 사진) 지적장애 2급인 강유진 씨(가운데)가 자원봉사자인 김형기(왼쪽) 배형주 씨의 도움을 받으며 구주산 정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