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거창한」 약수였습니다. 한 여름에도 손가락 하나를 3분 이상 못 담그고 있을만큼 차가웠어요. 마셔도 좋고 목욕을 해도 효험이 좋다 해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수제비를 펄펄 끓여서 한 그릇씩 잡숫고 물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지금은 목욕을 못하게 계곡 웅덩이는 메워버렸지만….』

산청 왕산（王山·923.2ｍ） 초입의 「류의태약수터」 입구에서 만난 농부는 구수한 입담으로 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위장병 피부병에 좋다고 그래요. 타지에서 병 고치러 올라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효험을 본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이 샘을 아꼈던지 오는 길에 지렁이라도 한 마리 눈에 띄면 부정이 탈까봐 도로 돌아갔어요.』

물론 그 때는 이 샘이 「류의태약수터」로 불리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명의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가 ＴＶ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지자 그의 고향인 산청군에서 전설을 더듬어 재빨리 정비한 이름이다. 어쨌건 영험한 약수를 초입부터 만나는 것은 유쾌하다.

산청 왕산은 비범한 산이다. 입구에서 만나는 전（傳）구형왕릉（仇衡王陵） 때문이다. 전구형왕릉은 가야시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돌무덤 왕릉이며 7단으로 이뤄진 높이 7.15ｍ의 독특한 구조로 익히 알려진 문화유적이다（사적 제214호）. 다만 정확한 사료의 뒷받침이 모자라 「그렇게 전해져 오고 있다」는 뜻의 「전」이라는 글자를 달고 있다.

구형왕은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과 낙동강 유역에서 국운을 건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항복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만다. 뒷날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입신양명하면서 「왕가의 영광」은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당대에 나라를 잃고 신라의 신하로 전락한 구형왕은 망국의 한을 안고 산으로 들어가버린다. 그 산이 바로 왕산이다.

이번 주 산행은 경남 산청의 「왕산∼필봉」코스다. 이 산행로는 지리산 자락이어서 전망이 좋고 주목할만한 역사유적들을 많이 품고 있다. 최근 류의태약수터까지 보태지면서 인기가 더 높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왕산과 이어지는 필봉（筆峰·848ｍ）의 호쾌한 전망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산행시간은 4시간30분 정도이며 등산로가 뚜렷해 가족산행지로도 꽤 훌륭하다.

산청읍에서 「화계」방면 군내버스로 「왕산입구」（전구형왕릉）에 하차하면 도로가에 구형왕을 모신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이 곳을 둘러보고 「가락국 양왕릉」이라는 표지석을 참조해 건물 왼쪽 콘크리트길로 올라서면 왕림사를 거쳐 10여분 만에 전구형왕릉에 닿는다. 왕릉 맞은 편（왼쪽）으로 난 산길로 올라서면 바로 산행이 시작된다. 오솔길을 따라 10분이면 임도에 닿고,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또 10분 올라가면 「류의태약수」입구다. 약수까지는 7∼8분 거리.

목을 축이고 물통을 가득 채운 뒤 왔던 길로 다시 5분 내려가면 올라오다 만났던 「수정궁터」라는 표지판까지 돌아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수정궁터를 통과한다. 지금부터 숲속에서 「괴이한」 광경을 만난다. 수많은 나무들이 밑둥치가 잘린 흔적도 없이 길쪽으로 넘어져 있어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 왜인지 그 이유는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유격훈련이라도 하듯 몸을 이리저리 굽혀가며 걷지만 길이 뚜렷해 큰 걱정은 없다. 20분 정도면 반듯한 능선위 오솔길로 이내 올라선다. 이 루트는 기존 「왕산∼필봉」 등산로에서 중요한 능선상 이정표인 망경대를 포기하고 대신 류의태약수를 선택하는 코스다.

지능선위 오솔길을 따라 왼쪽으로 20분쯤 올라서면 주능선 바로 아래 모셔진 묘지를 만난다. 묘지에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따라 10분이면 왕산 정상으로 곧장 연결되는 주능선에 닿는다.

주능선에서 산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정상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표지석 하나 없이 수수하다. 하지만 조망 만큼은 시원스레 열린다. 정상에 도달한 뒤 몸을 틀지 않고 바위 위에 올라서면 왼쪽 아래가 톡 솟은 암봉이 눈에 들어온다. 이 봉우리가 필봉이다. 먹을 함빡 머금은 붓끝 모양이다. 정면이 웅석봉, 그 오른쪽 낮은 고개가 밤머리재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천왕봉과 그 아래 왕등재, 오른쪽으로 새봉, 상내봉이 자리하고 있다. 경호강과 산청읍도 한 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30분만에 바위투성이의 필봉 정상에 올라선다. 바위로 이뤄진 길이라 걸음걸음 신이 난다.

필봉에서 왔던 길로 5분 정도 내려서면 첫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능선을 거쳐 산길이 숲속으로 접어들고 25분만에 또렷한 갈림길 앞에 닿는다. 왼쪽으로 꺾여내려가는 길은 특리방향, 직진하면 왕복사쪽이다. 왕복사쪽 길을 잡고 15분이면 임도에 닿으며 다시 25분 더 내려가면 불사가 한창인 왕복사 뒤로 떨어진다. 이 곳에서 절마당으로 들어서지 않고 왼쪽으로 꺾어 콘크리트길을 따라가면 30분만에 산청행 버스가 정차하는 도로에 닿는다.



# 교통편

부산에서 출발할 때는 부산 사상구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다. 부산∼산청간 직행 시외버스는 오전 5시40분, 6시19분, 6시59분, 그 이후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요금은 8천원. 2시간30분 소요.

버스 배차시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방법도 있다. 부산에서 진주까지 가 진주서 산청행 버스로 갈아타는 방법이다. 부산∼진주（4천9백원）, 진주∼산청（2천5백원）행 버스가 모두 10분 간격으로 운행하므로 버스를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다. 부산에서 출발해 산청으로 가는 모든 버스는 진주를 경유한다.

산청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화계」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구형왕릉」（또는 왕산입구라고도 함）에서 하차한다. 화계 가는 버스는 오전 6시30분, 7시50분, 8시20분, 10시, 11시20분 등에 있다. 오전 10시 버스 정도면 당일산행에 적당하다. 요금은 1천2백원. 15분 소요.

왕복사 뒤로 하산하면 절 뒤의 넓은 콘크리트길에 닿는다（절 앞마당으로 들어서지 말고）. 이곳에서 곧장 왼쪽으로 꺾어 길을 따라 걸어나가야 한다. 도로에 닿으면 화계에서 나와 산청읍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1시간 남짓 간격으로 다닌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산청읍까지 멀지 않은 거리이므로 택시를 불러도 무방하다. 산청개인택시 （055）972-4848. 973-2224 등. 개인차량을 몰고 간다면 구형왕릉입구 덕양전쪽에 주차하고 「특리」방향으로 하산해야 한다. 특리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시 덕양전으로 되짚어가면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