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영구 행복 아카데미 강연
- ‘알쓸신잡’서 잡학다식 진면목
- “현실서 엄격한 잣대 대다가도
- 소설선 이해·공감 통해 성숙”

- 처가가 부산… 3년 거주 인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을 쓴 인기 소설가 김영하. 지난해 이맘때 방영된 프로그램인 ‘알쓸신잡’에서 그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잡학다식한 데다 말 잘하고 재미있는 지적인 남자. 팟캐스트(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를 통해 찬찬히, 감정 없이, 무던하게 책을 읽어주며 청취자를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를 혹자는 ‘문학계의 아이돌’로 칭한다.

지난 18일 부산 수영구를 찾은 김영하 작가가 법적·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오랜 세월 사랑받고 있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8일 김영하 소설가가 부산을 찾았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부산 수영구가 마련한 ‘수영 행복 아카데미’의 특강자로 나섰다. 그는 유독 부산과 인연이 많다. 처가가 수영구에 있는 데다 미국 등지에서 3년여 만에 돌아와 다시 터를 잡은 곳이 부산 해운대였다. 2012~2015년 해운대에서 살면서 ‘살인자의 기억법’을 출간했다.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행사 시작 1시간 전부터 몰려든 방청객은 구청 구민홀의 200여 석이 다 채워져 앞뒤, 좌우에 서거나 바닥에 앉아 빽빽이 자리를 채웠다. 캐주얼한 복장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풀어내며, 유머 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강연자에 청중은 뜨겁게 환호했다.

“이렇게 재미없는 주제를 듣기 위해 이렇게 많은 분이 오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감사를 전한 김 작가는 “3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지하철을 타서 보니 모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느라 단 한 명도 책을 읽지 않더라. 정말 깜짝 놀랐다. 그러다 2013년 ‘살인자의 기억법’을 내놓았는데 내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렸다.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한때 부자 되는 방법과 같은 자기계발서가 유행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책에서 얻은 건 기대보다 실망감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꾸준히 늘거나 적어도 제자리”라고 말했다.

소설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뭘까. “소설은 ‘우리가 하마터면 겪었을 법한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불륜 변태 비행 등 현실에서는 법적·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행위를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유롭게 해요. 현실에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도 소설에서만큼은 도덕적 판단을 멈추고 캐릭터에 몰입하죠. 우리를 대신해서 숱한 일을 겪은 캐릭터들을 보며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감능력을 배웁니다.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고, 자기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 소설을 읽는 이유죠.”

다시 그는 “소설 외 모든 종류의 책은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다. 오직 소설만이 실패를 이야기한다. 소설은 예기치 못한 미래에 일어날 비극, 문제 등에 감정적으로 대비할 수 있게 한다. 감정에 들러붙은 기억은 오래가기에 남의 입장에 비추어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 소설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몇 년 전 부친의 별세로 상주가 됐을 때, 이미 소설 속에서 묘사했던 그 장면과 감정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감정을 ‘언어화’하는 능력도 소설의 힘이다. 대한항공 세 모녀의 경우, 떼 쓰고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언어화가 부족한, 어린이의 심리 상태와 똑같다는 것. “소설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동시에 자기의 감정을 받아들여 내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는 능력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요.”

특강에 앞서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니 김 작가는 부산과 부산 음식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해운대 광안리 바닷가를 즐겨 걷고, 해운대의 도원과 메르씨엘, 서구 부평시장의 연근해 우럭탕, 수영구 민락해변에서의 치맥, 송정의 숱한 카페 등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행복을 준다.

“전 그러고 싶은데, 가부장적 정서가 강해 아내가 싫다고 하네요.” 부산에 다시 살러 오라는 말에, 부인을 배려하는 남편의 대답이다. 임은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