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8군 통역병으로 근무 시작 

- 1950·60년대 美·UN 관리 때

- 기록 전무 공원 역사 산증인

- “남북 전사자 교환 당시 생생

- 발굴된 시신 냄새 맡으며

- 전쟁 참상 몸소 실감하기도”

노옹은 취재진을 만나자마자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6·25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955년 한 묘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장소에는 흰색 십자가가 빼곡했다.

19일 정태홍(86) 씨는 현재의 유엔기념공원을 ‘유엔묘지’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지금은 묘비로 동판을 쓰지만 당시에는 나무 묘비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서 영령을 위로했습니다. 비바람에 삭으면 교체하는 게 일이었죠.”

부산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유엔기념공원은  6·25전쟁 참전 유엔군의 묘지로, 1951년 조성돼 올해로 66년째를 맞았다. 공원 측에 따르면 그 공식 명칭이 재한유엔기념묘지였으나, 2001년  3월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변경했다. 정 씨는 공원이 미군과 유엔에 의해 관리됐던 1951년부터 23년간의 기록이 전무한 시절을 기억하는 산증인이다. 공원이 조성되고 1년 뒤인 1952년 미8군 사령부 소속의 통역병으로 시작해  부소장 직 등을 역임하며 40년간 공원에서 근무했다. 1992년 퇴직한 그는  2015년부터 2년 임기의 공원 고문 직을 맡고 있다. 

사진을 다시 보니 묘지 뒤쪽에 깃발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정 씨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묘지에 묻힌 유엔군의 고향 나라의 깃발이다. 지금도 그대로”라고 설명했다. 설립 초기 공원은 유엔군의 유해가 고향으로 보내지기 전에 가매장된 임시묘지의 역할을 했다.

“묘지가 부산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마산 대전 영등포 등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곳곳의 유해가 부산에 집결하면 일주일 뒤 배가 와서 본국으로 데려갔죠. 유해를 가매장한 뒤 되파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했습니다. 1만1000여 구의 유해가 부산에서 잠시 안식을 한 뒤 고향으로 떠났습니다. 3개 중대가 일을 맡아야 할 정도로 대규모였죠.”

당시 그는  유해의 상태, 사망 경위, 가족 관계 등 정보가 담긴 매장 기록지를 작성하는 일을 도왔다.

정 씨는 공원의 관리 주체가 3차례 바뀌는 동안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미군은 최초 공원을 설립해 운영을 하다가 그 관리권을 유엔본부에 넘겼다. 10년 뒤인 1974년 공원 관리업무가 1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에 위임됐다. 정 씨는 “유엔의 관리 시절 구소련과 중국 쪽에서 관리비 납부를 거부해 운영이 쉽지 않았다. 이후 한국 정부가 예산의 85%를 책임지게 됐지만, 운영비를 제때 받지 못해 직원 급여를 주느라 애를 먹은 때가 종종 있었다”고 어려운 시절을 떠올렸다.

특히 정 씨는 1954~1955년 남·북 간에 전사자 교환을 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주변과 유엔공원 인근 산비탈 등 곳곳에 묻힌 북한·중공군 유해를 파서 배낭에 담아 화물열차로 실어 판문점에 올려 보냈다. 또 북한에서 넘겨받은 유엔군 유해는 유엔묘지에 가매장했다. 그는  “시신 썩는 냄새가 묘지 주변에 진동했다. 주민의 항의도 많이 들어야 했다. 전쟁의 참상을 또다시 몸으로 실감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정 씨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자다. 일본에서 태어나 14세였던 1946년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지난 10년간 원폭이 일어났던 8월 9일 일본 현지의 피해자 행사에 참가했다. 올해도 1만 명 서명운동에 참여했다”면서 “늘 바쁘지만, 기력이 다할 때까지 공원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이승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