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대(大-0)가득찰 영(皿-4)같을 약(艸-5)빌충(皿-4)
중국 宋代(송대, 960~1279)에 抹茶(말차, 돌절구에 찻잎을 잘게 찧어 마시는 차) 곧 가루차를 마시는 풍습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송나라의 天目茶碗(천목다완)도 아울러 전해져 당시의 귀족, 선승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戰國時代(센코쿠시대, 1467~1573)에 취향이 달라지면서 ‘고마 찻잔’ 곧 ‘高麗茶碗(고려다완)’이 인기를 끌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고려다완에 푹 빠졌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에게 영지 대신 찻잔을 주기도 했다. 지배자를 비롯해 무사 계층과 귀족이 너도나도 고려다완을 애지중지하자 사람의 목숨이나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값이 뛰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다완을 전혀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陶磁器(도자기) 전쟁’ 또는 ‘茶碗(다완)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이미 세계 최고의 도자기 기술, 시쳇말로 세라믹 분야에서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기술에서 평민이 일상에서 쓰는 ‘막사발’이 나왔는데, 그 막사발의 형태와 오묘한 빛깔이 일본인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아 ‘고려다완’이라 일컬어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의 도공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간 것은 도자기를 자체 제작하려는 열망과 욕심 때문이었다. 근대에 일본이 도자기 강국이 된 바탕이 거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토록 만들고 싶어 했던 고려다완은 이제까지 단 한 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기술에 문화적 기질과 미학이 어우러진 것인데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1년 전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세 품목의 수출을 규제해 한국을 궁지로 내몰려 했다. 한국은 자체 개발과 생산으로 대응했다. 일본 정부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노자가 “大盈若盅, 其用不窮”(대영약충, 기용불궁) 곧 “꽉 찬 것은 속이 빈 듯하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고 말한 대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는 창조적 기운이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정천구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