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2016)에서 우리는 기성의 스테레오 타입과 코드를 뒤집으면서도 드라마와 정치성의 균형을 잃지 않는 재기 발랄함을 보았다. 연약함의 상징과도 같은 토끼인 주디가 역경을 딛고 제 몫을 하는 경찰로 성장하는 과정의 스토리는 약자가 성공하기를 바라며 응원하게 되는 언더독(Underdog) 효과로 동정과 공감을 자아내며 손쉬운 몰입을 제공하지만, 그 대칭점에 서 있는 음모의 주역 주토피아 부시장을 양으로 설정함으로써 약자는 선하기 마련이며 강자를 악함의 표상으로 여기곤 하는 정치적 도그마(dogma)와 역차별의 오류를 지적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 영화는 21세기 디즈니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빛낸 수작이었다.
 |
| 영화 ‘주토피아 2’의 한 장면. |
일반적인 통념과 이미지를 뒤집음으로써 정치적 올바름을 찾는 기조는 속편인 ‘주토피아 2’(2025)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다만 반전(反轉)도 반복되면 식상해지기 마련이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전은 더 이상 반전이 아니라는 함정은 이 영화도 피하지 못한다. 이쯤 되면 디즈니 근작들의 창작에는 모종의 공식(formula)이 자리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데, 범인으로 의심받던 뱀과 기타 파충류들이 피해자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여우인 닉의 과거사나 맹수들과 다르지 않고, 노골적으로 믿음직스러운 조력자처럼 나서는 캐릭터가 실은 악역이었다는 점 또한 야욕을 감추고 있던 ‘겨울왕국’(2013)의 한스를 판에 박은 듯 닮아있다.
그러나 ‘주토피아 2’가 틀에 박힌 안이한 속편인 건 아니다. 비록 선악의 구도는 소수집단의 피해자와 다수 집단의 가해자라는 단순함으로 입체성을 잃었지만, 주토피아의 다른 공간들로 영역을 확장한 이 속편은 훨씬 속도감 있는 전개 방식을 취하고 주제의 초점을 바꿈으로써 소포모어 징크스를 영리하게 피해 간다. 아마도 오랜 영화광이라면 밀수범 체포 작전의 거대한 액션 시퀀스로 신경을 환기하면서 메인 플롯의 단서를 넌지시 제시하는 도입부, 시퀀스마다 장소를 이동해가며 다양한 공간의 이국적 색채를 번갈아 제시하는 전개에서 영락없이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와 같은 로저 무어 시절 007 영화를 떠올리다가, ‘샤이닝’(1980)의 패러디가 나오는 순간 박수치며 즐거워했을 법하다.
장르영화의 매력이 극대화된 외양의 이면에는 역사의 심연을 대면하고자 하는 진지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의 주인을 밀어내고 주인을 참칭한 자. 조작된 신화로 기원을 은폐한 자. 링슬리 가문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에서도 묘사된 미국의 주류 엘리트 계층의 오만과 탐욕에 대한 풍자이며, 추방된 파충류들에게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비롯한 미국 역사의 소수자성을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슨 카운티 전쟁의 추악한 실상을 까발리며 개척을 프런티어 정신이라 미화해 온 서부극의 근간을 해체하고자 했던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1980)에서 익히 보았던, 팽창의 야욕에 가득 차 비주류를 중심에서 바깥으로 밀어내길 거듭했던 피로 물든 역사 발전의 과정은 20세기에도 흑인이나 이민자 주거 구역을 철거해 도심을 확장하고 그곳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식으로 반복되지 않았던가? 동물들의 낙원 ‘주토피아’가 다문화 국가로서 미국의 이상향에 대한 메타포였다면, ‘주토피아 2’는 미국의 기원에 대한 탐색이자, 매번 반복되어 온 폭력의 보편적 양상에 대한 역사적 우화가 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