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V 페라리’(2019)에서 우리는 포드사의 드라이버와 엔지니어가 르망 24시에 출전해 페라리의 신화를 꺾고 승리하는 역전극을 지켜본 바 있다. ‘페라리’(2023)는 ‘포드 V 페라리’가 다룬 실화의 이면을 비추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이다. 영화는 엔초 페라리(애덤 드라이버)가 1957년 밀레밀리아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루며, 적자 운영으로 회사는 파산 직전에 내몰려 있고, 집안에서는 공동 경영자인 아내와의 알력 다툼에 질려있는 내우외환의 곤경에 처한 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건조한 시선으로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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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페라리’의 한 장면. |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 레이싱을 하는 게 아니라, 레이싱을 지속하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고집스러운 장인은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스폰서를 필요로 했고, 피아트의 아넬리 회장과의 교섭에 임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포드와의 인수합병에 관심이 있다는 루머를 흘린다. ‘페라리’의 이야기는 페라리가 자신의 술책에 낚여 멋모르고 인수전에 뛰어든 헨리 포드 2세를 조롱하는 초반 시점까지를 ‘포드 V 페라리’와 공유한다.
‘블랙코드’(2015)의 처참한 실패로 말미암아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마이클 만의 오랜만의 복귀작은 실은 30년 가까이 준비해 오던 숙원이었다. 시드니 폴락 감독과 함께 브록 예이츠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로버트 드 니로를 주연으로 내정해 두었지만, 한물간 장르라며 영화사들은 외면했고, 배역도 크리스찬 베일과 휴 잭맨이 합류했다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떠나는 등 표류하길 거듭했다.
그래서인지 ‘페라리’는 의욕은 있지만 전성기를 잃은 작가의 야심작이 지니기 마련인 아쉬운 면을 드러내곤 한다. 요절한 아들의 묘소에서 흐느끼는 페라리의 독백을 정면 얼굴 클로즈업으로 길게 포착하는 단순한 연출은 배우의 연기가 인물의 심리에 융합되지 못하고 겉돈다는 인상을 주며, 후반 레이싱 시퀀스 도중에는 숏의 연결이 거칠고 헐거운 순간이 종종 나타나 몰입을 깨곤 한다. 그러나 거장의 태작은 범용한 감독의 수작보다 낫다는 이 방면의 격언처럼 ‘페라리’는 가볍게 넘기기엔 아까운 작품이기도 하다.
일에 전념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나머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마저 집어삼켜 버린 현대의 사투르누스. 평범한 사람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친 장벽 안에 자신을 가둔 고독한 남자. 그것이 마이클 만이 바라본 엔초 페라리의 본질이다. 선글라스는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구이며, 아내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와 불륜 관계의 애인 리나 라르디(쉐일린 우들리)는 각각 냉혹한 사업가인 한편으론 다정한 남편의 얼굴을 지닌 그의 야누스적 면모를 쪼개어 비추는 거울 이미지가 된다.
그런 점에서 ‘페라리’는 ‘비정의 거리’(1981) 이래 ‘히트’(1995)와 ‘콜래트럴’(2004)에서 정점을 찍었던 작가적 일관성의 연장선에 있다. 또한 전기영화로서 인물을 순일(純一)하게 평면화시키지 않고, 깨진 거울처럼 무수한 겹으로 찢긴 존재의 초상을 포착해 냄으로써 통일된 자아 따윈 한갓 미망(迷妄)에 지나지 않음을 꿰뚫는, 인간 존재의 복잡성에 대한 노장의 깊은 시선과 저력을 증명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