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2023)은 다급하다. 아벨 강스의 무성영화 ‘나폴레옹’(1927)이 장장 5시간32분을 들이고도 유년기에서 이탈리아 원정까지만 다룬 것과 대조적으로, 프랑스 혁명과 툴롱 포위전, 왕당파 반란 진압과 이집트 원정, 쿠데타, 황제 즉위와 아우스터리츠 전투, 러시아 원정 실패와 엘바섬 유배, 워털루 전투 패배와 쓸쓸한 말년에 걸치는 장대한 흐름을 담아내기엔 2시간38분 러닝타임은 턱없이 짧고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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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들리 스콧 감독 ‘나폴레옹’의 한 장면. |
여러 사건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다 보니, 플롯의 구멍이 노출되고 드라마의 감정은 수시로 끊기며, 인물에 대한 설명이 부실해 몰입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4시간10분의 감독판이 공개되더라도 영화는 불편할 것이다. 감독의 관심은 영웅 나폴레옹이 아닌, 사인(私人)으로서 그가 지닌 범속(凡俗)한 면모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분명 나폴레옹은 군사적 천재이고 정치가로서 능력과 야망도 대단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정욕구와 콤플렉스가 깊이 자리했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꼴사납게 당황하거나 초조해하며, 아내의 불륜 탓에 원정군을 내팽개치고 홀로 귀국하는 등 분별없고 충동적인 모습도 내비친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에게도 결핍과 나약함을 감추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의 얼굴이 있는 것이다.
사적인 감정과 동기에 휘둘리는 작은 인간이 어떻게 국가와 권력, 수백만의 인명 등 그토록 거대한 것을 휘두를 수 있었는가. 이러한 역사의 얄궂은 아이러니야말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나폴레옹’ 에서 리들리 스콧은 더는 ‘킹덤 오브 헤븐’(2005) ‘로빈 후드’(2010)에서와 같은 이상주의적 영웅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십계’(1956) ‘스팔타커스’(1960)와 같은 전형적인 대형서사극이 주인공에게 신적인 위엄을 부여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역사 인물을 ‘탈신화화’하는 이러한 방향성에는 흔히 ‘아버지-신’으로 표상되는 오이디푸스적 권력에 대한 불온한 전복의 함의가 깃들어있다.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미래사회를 지배하는 기업의 주인 타이렐 회장은 자신이 만든 인조인간을 죽음에서 구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버지이고, ‘프로메테우스’(2012)에서 인류를 창조한 엔지니어들은 기대와 달리 자비롭지도 불멸이지도 않다. ‘올 더 머니’(2017)의 폴 게티는 거부이지만 실상은 돈의 군주가 아닌 돈의 노예이며, 손자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는 무관심한 냉혈한이다.
조세핀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데 강박적으로 매달리지만 제대로 된 ‘아버지-되기’, 왕조 성립과 권력 승계에 실패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은 이처럼 오이디푸스적 표상과 권력에 냉소와 비판의 자세를 취해왔던 리들리 스콧 작가주의의 발전선상에 정확히 부합한다.
초인(超人)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상만이 있을 뿐이다. 역사 현실 속 숱한 영웅과 위인의 실상이란 대개 그러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거칠게 편집돼 앙상한 뼈대만 남긴 극장판에도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카운슬러’(2013)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장의 서늘한 시선은 인간주의적 이해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 현실의 차가운 공허(空虛), 근본적인 무의미성을 차분히 응시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