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이두용 감독을 직접 뵙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용호대련’(1974)과 같은 태권도 액션영화로 초점이 옮겨갔는데 대화 도중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악역을 멋있게 그려야 해요. 그래야 극복하는 주인공이 돋보이거든.”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적잖이 놀랐었다. 당시 한국영화에서 인상적인 악역의 등장, 또는 악역의 캐릭터를 신경 써서 다듬은 각본이 얼마나 되는지 당장 뇌리에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인공과 악역은 항상 대칭 관계에 선다. 능력 있고 품격을 갖춘 악역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그에 맞서야 하는 주인공의 설정이 다듬어지고, 악역의 동기와 욕망이 명확히 설정되면 주인공 행동의 당위성, 이야기의 갈등구조와 플롯도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시나리오 창작에서 이런 경우는 좀처럼 드물었던 것 같다. ‘극한직업’(2018)의 희화화된 경찰들은 그만큼 어설픈 악당들을 만났고, ‘봉오동 전투’(2019)의 일본군은 잔학함 못잖게 독립군의 유인에 순순히 휘말리는 멍청함을 과시했다.
‘한산 : 용의 출현’(2022)은 다르다. 김한민이 취한 전략의 영리함은 이순신(박해일)이 지닌 명장으로서의 면모를 살려내려면, 적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를 범용치 않은 인물로 그려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한 데 있다. 부산포에 막 상륙한 와키자카가 취하는 행동들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인물이 지닌 본질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나머지 장병의 사기를 꺾지 않고자 귀환한 패잔병들을 즉결 처분하는 데선 잔인성과 냉정함을, 거북선과 충돌해 박살난 군함을 유심히 관찰하거나 첩보와 작전 수립에 공을 들이는 면면에선 이성적인 치밀함을 드러내며 긴장감을 부여한다.
일본 수군의 군세는 막강하고 지휘관 또한 상당한 수완가이다. 전황은 불리하고 내부에는 훼방꾼 원균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온다. 수세에 몰린 이순신을 주변의 제장들은 불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이들의 답답한 기분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하지만 주인공이 극한 상황으로 몰리면 몰릴수록 그의 선택이 불러오는 결과의 카타르시스는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초중반부의 예비서사가 탄탄히 다져져 있기에,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한산도 해전 시퀀스는 휘몰아치는 스펙터클과 서스펜스, 운율의 몽타주로 화려하게 장식될 수 있었다.
‘명량’(2014)에서 우리는 수난 받은 구국의 영웅을 도와 백성들이 위기에 빠진 국운을 구원해낸다는 메시아주의의 종교극을 보았다. 그리고 김한민은 괄목할 만한 연출의 발전을 선보이며 또 다른 이순신의 서사를 내놓았다. 비판받을 지점이 없는 건 아니나 ‘한산’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사극의 이정표이며, 신파 없이도 한국의 역사와 인간을 그려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