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뮬란’(2020)은 현재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동원되고 오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영화는 근래 주류 상업영화에서 디즈니가 여성주의 서사를 빚어가는 방식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한다. ‘캡틴 마블’(2019)이나 ‘스타워즈-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2019)에서 우리는 극의 전면에 대두하는 여성주인공을 보았다. 그러나 이들 영화는 영웅 서사에서 인물에게 주어져야 할 역경과 고뇌 그리고 극복의 과정을 대폭 생략하면서, 영웅적 주체로 거듭나야 할 여성 캐릭터에 납득할만한 보편적 설득력을 부여하는 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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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뮬란’ 스틸. |
원작 애니메이션 ‘뮬란’(1998)과 실사영화 리메이크작이 갈라지는 지점도 마찬가지이다. 두 영화 모두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으로 짜인 사회질서의 견고한 틀 속에서 차별과 억압을 넘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하고자 하는 여성 주인공을 그린다. 하지만 인물과 서사를 다루는 방식에서는 리메이크가 도리어 22년 전의 원작보다 퇴보한 면면을 노출한다. 원작의 뮬란은 평범한 소녀로, 처음에는 군사 훈련을 버거워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 전사로 성장한다. 반면 리메이크작에서의 뮬란(유역비)은 처음부터 천부적인 ‘기’를 타고나 우월한 능력을 과시하는 초인으로 묘사된다.
다친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해 입대를 결심한 원작 속 뮬란의 모습은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이의 영웅적 비장함과 이타적인 심성을 부각하는 명장면이었지만, 리메이크작에서 뮬란의 동기는 자신을 묶어두려는 집안에 대한 반항심에 뛰쳐나오는 식으로 가볍게 연출돼 행동의 동기와 내적 갈등의 깊이를 잃고 만다. 리메이크작의 이러한 변경은 원작이 가지고 있던 ‘잠재성을 일깨우고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는 근대적 여성상’이라는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훼손하고 만다.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지도 않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대한 고민은 결여돼 있다. 단지 초인적 능력을 뽐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일차원적인 캐릭터성을 두고 진지한 여성주의 서사라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메시지를 강변하기 위해 극의 개연성과 설득력을 무너뜨리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메시지조차 조악하다는 데 있다. 마녀 시아니앙(공리)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세상을 꿈꾸지만, 스스로가 지닌 강력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오랑캐의 왕 보리 칸에게 종속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남장으로 정체를 감추고 있기에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는 마녀의 도발에 뮬란이 갑옷을 벗고 머리를 푸는 장면은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주인공을 표현하려고 한 의도였겠으나, 긴 머리를 잘랐던 원작의 뮬란과는 반대로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복귀해버리는 논리적 모순을 낳고 만다. 검에 새겨진 유교적, 봉건적 가치의 화두를 클로즈업하는 엔딩은 그 모순에 정점을 찍는다.
잘 다듬어진 인물과 서사는 그에 따르는 다양한 정치적 해석과 심도를 얻는다. 반대로 메시지를 강변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짜낸 서사는 도리어 의도하고자 한 본래의 메시지와 설득력을 잃고 만다. 정치적 올바름이 화두가 된 시대에 어째서 우리는 22년 전보다도 뒷걸음친 영화와 메시지를 봐야 하는 것일까?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