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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SF 껍데기를 쓴 첩보물과 고전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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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9-02 19:16:16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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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2020)은 얼핏 어려워 보인다.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상대적 시간을 뒤집는 인버전(Inversion)이라는 개념이 현실의 인과 법칙과 선형적 시간 순서를 따르는 것에 익숙한 관객을 처음부터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시간 여행의 근본 원리는 ‘터미네이터’(1984)나 ‘백 투 더 퓨처’(1985)에서 익히 보았음직 한 ‘타임 패러독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미래에 닥쳐올 일을 막거나 수정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야 하며, 다른 시간대의 자신과는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시간여행 SF의 또 다른 변주. 다분히 현학적으로 보이는 설정의 현혹을 걷어내면 이 영화의 바탕은 어이없으리만치 단순하다.
영화 ‘테넷’의 한 장면.
뜯어보면 이 영화의 골격은 다분히 고전적인 요소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수요원이 세계 멸망을 획책하는 악당을 저지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된다는 플롯의 근간은 첩보 액션물의 고전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와 ‘007 썬더볼’(1965)의 뼈대를 끌어오고 있으며, 주인공(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캣(엘리자베스 데비키) 간의 관계는 ‘007 여왕폐하 대작전’(1969)의 로맨티시즘을 상기시킨다. 어떠한 맥락도 밝혀지지 않은 채 도입부에 큰 액션 시퀀스를 터뜨리면서 관객의 주의를 환기하고 나서야,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해나가는 구성 또한 ‘007 골드핑거’(1964) 이래 정립된 007 영화의 스타일을 차용해오고 있다.

다시 말해 ‘테넷’은 ‘인셉션’(2010)에 이은, 놀란의 버전으로 재해석된 제임스 본드 영화다. 놀란은 다소의 물리학적 지식에 기반한 설정과 비선형적인 교차 편집을 통한 시간의 퍼즐 맞추기를 덧씌우며 고전 첩보 액션물의 유산을 참신한 것처럼 보이도록 손질한다. 이건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창조적 의욕이 과다투여된 걸작도, 실험에 실패한 망작도 아니다. 과학적 설정은 현란한 시각적 어트랙션을 합리화하기 위한 맥거핀일 뿐, ‘테넷’은 어디까지나 스펙터클을 제공할 의무에 복무하는 대중적 장르영화이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라는 대사는 영화의 정서를 잘 함축한다. 이 영화의 근간에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저항하고 행동하지만, 결국 그 행동이 정해진 운명을 완성한다는 고색창연한 그리스 비극의 구도가 깔려있다. 이러한 극의 전개는 제목에서부터 복선처럼 예고된 것이다. 악당인 사토르·위작을 판 화가 아레토·프리포트를 만든 회사 로타스·도입부의 오페라 극장 사건까지, ‘농부 아레토가 바퀴를 굴리는 일’(Sator Arepo Tenet Opera Rotas)이라는 뜻의 라틴어 문장에 연원한 ‘사토르 마방진’(가로·세로가 똑같이 읽히는 다음절로 이뤄진 문장)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놀란은 ‘인셉션’에서 보기에는 구조가 복잡해 보이지만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중심에 도달했다가 출구로 빠져나오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적 미로를 극에 차용했던 바 있다.

상하좌우 앞뒤를 바꿔 읽어도 문장이 성립하는 회문(回文)이나 거꾸로 연주해도 음악이 성립되는 역행 캐논(Crab Canon)처럼, ‘테넷’에서 놀란은 순환하는 시간의 미궁 속에 인물을 가두고 관객들을 초대한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구성을 취한 놀란의 영화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돌이켜보면 ‘테넷’은 놀란이 데뷔작 ‘메멘토’(2000)의 본령으로 돌아온 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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