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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산책 여행 <6> 여름 배롱나무꽃 구경

환한 진분홍 유혹…백일 동안 꽃잔치, 도시 곳곳 수놓다

  • 국제신문
  • 김미주 기자 mjkim@kookje.co.kr
  •  |  입력 : 2020-09-02 19:35:17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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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진의 배롱나무’ 국내서 유일 천연기념물
- 수령 800년 추정, 높이 7m 웅장하고 화려
- 나무가 있는 동래 정씨 가문 묘·사당 ‘정묘사’
- 공원 꾸며 개방… 숲 울창해 산책코스로 제격

- 충렬사 입구부터 호국선열 기리듯 도열하고
- 복천동 고분군 야외산책길 곳곳에도 피어
- 회색 건물·수많은 차량 속 황홀한 자태 뽐내

꽃이 귀한 여름, 화무십일홍(열흘 붉은 꽃은 없다)을 무색게 하는 배롱나무를 찾아 여름 꽃구경에 나섰다. 7~9월 붉은색 또는 흰색으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개화 기간이 100일 정도로 길어 목(木)백일홍이라고 불린다.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트려 100일 동안 만개하는 게 아니라 나무의 꽃송이가 저마다 피고 지며 100일을 이어간다.

선조는 배롱나무가 자손의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고 믿어 무덤 근처에 많이 심었다. 그래서 배롱나무는 ‘상여꽃’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꽃말은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 꽃말은 애잔하지만 붉은 꽃송이는 아름다워 봄의 전령 벚꽃처럼 여름을 환하게 밝힌다. 공원 골프장 등의 조경수로도 인기가 많은 수종이다. 이맘때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배롱나무를 중심으로 부산 곳곳에서 진홍색 배롱나무가 ‘꽃 릴레이’를 펼치며 도심을 물들인다.

■국내 최고령 배롱나무

   
국내에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배롱나무를 보려면 부산진구 양정동 정묘사를 찾으면 된다. 이곳에는 추정 수령 800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부산진의 배롱나무’가 있다. 동래 정씨 2대 조인 정문도 공의 묘소 양옆에 1그루씩 심은 배롱나무인데, 나무의 역사가 깊고 문화·생물학적 보전 가치가 인정돼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동래 정씨 선산인 화지산 자락의 정묘사는 동래 정씨의 시조 묘와 사당이 있는 곳이다. 정씨 가문이 묘역 일대를 화지공원으로 조성해 일반에 무료로 개방했다. 향나무 등 울창한 숲길로 조성된 화지공원은 한여름 태양을 피해 산책하듯 둘러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양정 화지문화회관 골목 안쪽에 있는 정묘사 입구로 들어간다. 입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심 한가운데 푸른 숲길이 펼쳐졌다. 발에 밟히는 자갈이 낯설면서도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100m쯤 따라 걸으면 정씨 가문의 위패를 모신 추원사가 나온다. 오른쪽 우거진 수풀 사이에 배롱나무가 있는 정문도 공의 묘소로 향하는 입구가 열린다. 이곳 묘소는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동래 정씨 가문이 조선 시대 상국 17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198명 등을 배출한 명문가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묘소로 향하는 입구는 넓지 않고 나무에 가려져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부산진의 배롱나무’ 알림판을 찾으면 발견하기 쉽다.

좁은 입구를 통과하자 작은 동산처럼 너른 언덕 위로 커다란 배롱나무 두 그루가 나타났다. 배롱나무는 보통 5m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이곳 가장 큰 나무의 높이는 7m를 훌쩍 넘는다. ‘아름드리’란 표현이 부족할 만큼 웅장한 크기다. 자세히 보면 나무의 원줄기는 죽고 주변 줄기가 자라나 고사목을 둘러싸며 끊임없는 생명을 불어넣듯 꽃나무를 받치는 모습이다. 묘소를 지키듯 울창한 초록 나무에 진홍색 꽃들이 눈처럼 흩뿌려졌다.

배롱나무에는 오랜 설화가 서려 있다. 옛날 옛적, 해안마을에 살던 한 여자와 사룡이라는 청년이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이들 사이에 독룡(이무기)이 끼어들며 비극적인 삼각관계가 형성됐다. 이무기와 사룡은 여자를 사이에 두고 목숨 건 결투를 벌이기로 한다. 사룡은 여자에게 약속한다. “내가 이기면 배에 흰 깃발을, 지면 붉은 깃발을 달겠소.”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사룡은 이무기를 죽이고 승리한다. 그런데 사룡은 이무기가 죽으며 흘린 피가 깃발을 붉게 물들인 걸 알지 못한 채 여자에게 향했다.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룡을 기다리던 여자는 배의 붉은 깃발을 보고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망연자실한 여자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는다. 사룡은 여자를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이듬해 그곳에 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늦은 여름 붉은 꽃망울을 터트린 나무는 100일간 붉은 꽃을 피웠다. 배롱나무다. 오매불망 사룡을 기다리던 여자의 마음이 스며든 것인지, 진홍빛 꽃잎은 시리고 선명하다. 가지째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이 처연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일지 모른다.

■충렬사·복천동 고분군 등 곳곳에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부산시 유형문화재 제7호)를 찾으면 충렬탑이 있는 입구부터 호국선열을 기리듯 도열한 배롱나무를 만난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순절한 호국 선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당시 항전을 표상한 충렬탑을 중심으로 안락교차로 일대를 2013년 ‘역사의 숲’으로 이름 붙이고 20여 종의 수목과 야생화 등 1만4000여 그루를 심었다.

다양한 수종은 철마다 꽃을 피워 봄여름가을겨울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지금은 줄지어 만개한 배롱나무가 안락교차로를 오가는 수많은 차량 사이로 진분홍 자태를 뽐낸다.

정문에 들어서 충렬사의 본당인 본전으로 향하는 길에도 배롱나무 행렬이 이어진다. 충렬사 입장은 무료이지만 현재 코로나19 재확산 우려로 휴관 중이라 내부를 관람할 수 없다.

충렬사와 가까운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에도 배롱나무 꽃이 피었다. 복천동 고분군은 삼국시대 가야의 고분 등이 출토된 곳이다.

이곳은 야외 전시장이 있는 고분군 산책길을 중심으로 듬성듬성 한두 그루씩 꽃을 피웠다. 널따란 고분군을 향해 가지를 드리운 배롱나무는 도심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설명: 1 정묘사 입구. 동래 정씨의 시조 묘와 사당이 있는 화지산 자락에 있다. 정씨 가문이 묘역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해 무료 개방했다. 2 배롱나무로는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부산진의 배롱나무’. 추정 수령 800년으로 가장 큰 나무는 7m가 넘는다. 이맘때 진홍색 꽃잎이 나무를 덮으며 장관을 연출한다. 3 충렬사를 찾으면 입구부터 호국선열을 기리듯 도열한 배롱나무가 방문객을 반긴다. 4 복천동 고분군 산책길에 꽃을 피운 배롱나무. 널따란 고분군 쪽으로 가지를 드리운 모습이 색다르다.>

글·사진=김미주 기자 mjkim@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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