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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장르 영화 탈피 N포세대 냉엄한 현실에 집중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2-12 18:56:57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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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의 나라’(2018)의 도입부에서 진단을 받으러 온 성혜에게 의사는 말한다. 불면증은 심리적인 요인이 크다고, 휴식을 취하고 안정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성혜의 하루 일과를 소묘하는 몽타주를 보게 된다.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쉼 없이 이동하는 성혜의 모습을 영화는 수평이 강조된 시네마스코프 프레임과 절제된 카메라 움직임으로 포착한다.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놀란 건 인물에게 주어질 법한 휴식의 시간이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강박에 사로잡힌 듯 휴식 없이 일하고, 공부하고, 구직에 나서는 성혜의 얼굴은 말라버린 고목처럼 항상 무표정하다. 잘 먹고 잘 쉬라는 의사의 조언은 냉엄한 노동의 현실 앞에 부정되고 마는 셈이다. 대사와 영상을 충돌시키는 이 편집은 다분히 의도적이며, 오늘날 현실에 던지는 감독의 발언에 다름 아니다.
   
영화 ‘성혜의 나라’ 스틸.
자전거나 스쿠터로 돌아다니는 성혜의 동선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는 이동의 모티브는 인물이 겪는 고독과 소외의 감정을 부각시킨다. 쉼 없는 노동의 연속. 둥지 없이 떠도는 도시 유랑민의 삶. 영화는 29세의 한 젊은 여성이 처한 현실의 풍경을 비추는 걸로 118분을 일관한다. 노력해서 대기업 인턴 사원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성추행을 당하고 인권위원회에 고발한 뒤로는 어느 기업의 면접을 봐도 떨어지기만 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신문배달을 병행하며 취업공부를 하지만, 방세 내고 나면 빠듯한 수입을 쪼개 집안 병원비에 보태야 한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서 거리로 나앉을 판에,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낳아서 가정을 꾸리는 미래를 상상하기엔 당장이 급하다.

이 모든 상황이 극적인 사건의 개입, 양식화된 연기 따위를 일체 배제한 담담하고 건조한 분위기 속에, 핏기 없이 창백한 흑백영상에 담긴다.

근래 한국영화에서 청년 세대를 그린 대표적인 영화를 꼽자면 이병헌의 ‘스물’(2014)이나 김주환의 ‘청년경찰’(2017), 독립영화 진영에선 신수원의 근작 ‘젊은이의 양지’(2019)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영화들은 청년으로 세대만 바꾸었을 뿐 실상은 기성 장르 영화의 배역을 답습하거나, 상업영화에 요구되는 서사의 관습과 타협하면서 현실감을 잃은 작위적인 전개와 윗세대의 시점에서 내려다보는 계몽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정형석 감독의 영리한 점은 장르와의 영합을 포기함과 더불어 섣부른 감정이입을 지양하고 인물을 관조하는 태도의 객관성에 있다. 장르 영화의 관성과 낙관주의를 거부하고 현대의 서울에서 펼쳐지는 청년 빈곤의 이야기를 정제된 형식주의와 리얼리즘으로 대체하면서 ‘성혜의 나라’는 모던 시네마의 전통을 현대로 다시 불러온다. 이 영화는 이만희의 ‘휴일’(1968)에 대한 21세기 한국영화의 응답처럼 보인다.

   
‘휴일’에서 이만희는 1960년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가난한 청년의 방황과 좌절, 현실의 가망 없음을 그렸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성혜의 나라’가 도착했다. 커피 한 잔 값도 아까워 거리를 서성이고, 낙태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곳곳을 전전해야 했던 청년의 우울, 서울로 표상되는 한국 사회의 삭막함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한국 상업영화가 끝내 외면하고 스크린 밖으로 퇴출해온 현실의 정직함, 출구를 찾아 헤매는 청춘의 불안한 초상이 바로 이 영화에 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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