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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조선 속의 일본 <4> 사라진 왜관, 남겨진 고관

먼저 생긴 왜관이라고 ‘고관(古館)’ … 아직도 지명 곳곳에 흔적 남아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7-10 18:37:05
  •  |  본지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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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끝나자 일본이 화친 손짓
- 사절단 정박지와 묵을 곳 필요
- 처음엔 절영도에 급조해 마련
- 무역시장도 자연스럽게 형성
- 교역량 등 늘어나며 시설 부족

- 부산진성 인근에 왜관 설치
- 일본인 체류자 1000명 웃돌자
- 초량에 ‘신관’ 만들어 또 이전

- 고관로 고관공원 고관입구 등
- 수정동 일대 현재도 ‘고관’ 명칭
   
1872년에 그려진 동래부지도.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진 후 두모포왜관이 구관이라고 표기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남겨진 ‘고관

고관(古館)은 옛 객관, 옛 게스트하우스란 의미로 구관(舊館)이라고 쓰기도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객관 즉 신관(新館)도 존재한다. 신관은 또 어디인가? 조선 시대 예조가 관장하던 의례를 모은 책인 ‘춘관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두모포는 구관(舊館)이고, 초량은 신관(新館)이다.” 두모포에 있던 왜관이 고관, 구관이고 초량에 있던 왜관이 신관이란 의미다.

부산 동구 수정동을 지나는 중앙대로에는 고관 입구 교차로가 있고, 그 길에는 ‘고관 입구’라고 쓰인 도로 표지판이 있다. 그리고 ‘고관00’이라고 쓰인 간판들이 눈에 띈다. 이런 간판은 예전보다 수가 줄었지만, 현재에도 아파트, 병원, 목재소, 음식점 등의 이름으로 사용되면서 ‘고관’이 이곳과 관련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에 2014년 도로명주소가 실시될 때 ‘고관로’라는 도로명도 새로 생겼다. 또 1914년 이후 고관공원도 생겼다. 고관은 조선 후기에 탄생해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긴 역사를 지닌 이름이다.

■‘부산포왜관’은 사라지고

   
1926년 작성된 ‘부산대관’에 수록된 ‘부산부전도’ 일부. 두모포왜관(고관) 터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전기 동·남해안 세 곳에 자리했던 왜관은 1547년을 기점으로 부산포 한 곳으로 통합됐고, 임진왜란까지 유지됐다. 전쟁이 끝난 직후 조선과 일본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이가 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사망한 상태였고, 일본 정계를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웃 나라 조선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선조실록’ 1599년 7월 14일 기록에는 대마도 관료 야나가와 시게노부가 부산포첨사 이종성에게 보낸 외교문서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일본에 잡혀갔던 포로 일부를 돌려보내면서 사절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두 나라가 우호관계가 맺어지면 일본에 있는 나머지 조선인도 돌려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종전 이후 화친을 위해 일본이 조선에 보낸 첫 시도였다.

1600년 2월에도 일본은 조선인을 돌려보냈고, 이후로도 조선인 송환과 함께 화친을 꾸준히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서는 일본의 본뜻과 정세를 파악하고자 했다. 1600년 5월 김달, 1602년 2월 전계신과 손문욱을 대마도에 보낸 것을 포함해 몇 차례 사절을 보냈다.

이렇게 양국의 사절이 오가는 상황이다 보니 일본 사절이 부산에 오면 묵을 곳이 필요했다. 예전같으면 부산포왜관에 들어가면 되지만, 부산포왜관이 있던 곳에 부산진성이 들어서면서 일본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영도에 왜관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사라지고…

1602년 11월 20일 오후 3시께 일본 배 3척이 영도로 접근하는 것을 황령산에서 망을 보던 조선 군인이 발견해 급히 보고했다. 배에는 대마도에서 보낸 일본 사절단 20명을 포함해 조선인 129명이 타고 있었다. 조선과의 화친을 요구하는 일본 사절이 타고 있는 배임을 확인하고 절영도에 정박하도록 했다. 1601년 11월 22일에도 일본인이 바다를 건너오자, 조선에서는 관료를 보내 일본인이 있는 절영도에 가서 조선에 온 이유를 물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화친을 요구하는 일본사절이 절영도, 지금의 영도에 정박해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1601년에는 화친을 요청하러 온 일본 사절 다치바나 도모마사가 조총과 창, 물소 뿔 등 무기와 무기 재료를 조선에 바치자, 조선에서는 값을 쳐서 사들였다. 또 일본인이 절영도에 정박하자 조선 상인이 절영도에 모여들었고, 조정에서는 1603년 절영도 무역시장 개설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처럼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국교를 채 회복하기도 전에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와 무역은 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을 절영도왜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절영도왜관의 규모는 알려지지 않고, 그 자리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영도구 대평동으로 여겨지지만, 한진중공업 자리로 생각하는 연구자도 있다. 1606년 봄에 국교 재개에 대한 논의가 조선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일본 사절이 머물던 절영도왜관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임진왜란 이전 부산포왜관은 사용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절영도에 사절을 머물게 하자니 종전 직후에 급히 만든 왜관이라 시설이 부족해 일본 사절도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갖춘 왜관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두모포왜관이다.

■두모포왜관이 세워졌다

1607년은 조선과 일본 관계에서 여러 의미를 가진 해다. 1607년 1월 서울에서 출발한 제1차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갔다가 7월에 무사히 돌아왔다. 조일 국교가 재개된 것이다. 다시 왜관을 세워야 하는데, 밀거래, 정보기밀누설 등 불법행위가 일어날 수 있으니 조선에서 통제를 할 수 있는 공간에 왜관을 지었다. 부산진성에서 5리 떨어진 곳이었다. 왜관 부지를 알아볼 때는 조선의 지관이 동원됐고, 일본 사절도 직접 부산을 돌아보면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곳에 뒷날 기장에 있던 두모포영(두모진)이 이전해 오면서 이때 지은 왜관을 두모포왜관이라고 부르게 됐다.

왜관 부지는 1만 평 정도인데, 수정동 해안가에는 일본 배가 정박하는 선창이 있었다. 선창을 보호하고, 수상한 배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바다에 나무 울타리가 설치돼 있었다. 해안에서 육지로 올라가면 완만한 구릉이 펼쳐졌고 왜관 안에는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왜관 정문인 수문(守門) 밖에도 좌자천이란 하천이 흘렀는데, 오늘날 지명으로 남아 있는 좌천이다. 왜관 수문 앞에서 매일 아침 시장이 열렸다. 육지에도 왜관을 둘러싸는 담장이 있었고, 담장 밖에는 왜관 출입을 경계하는 조선 군인의 초소인 복병막(伏兵幕)이 있었다. 두모포왜관 뒷산에는 왜관에서 죽은 일본인의 무덤이 있었다. 사망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은 이곳에 묻혔다.

■70년 살이, 두모포왜관

두모포왜관이 있을 당시에 회답겸쇄환사가 2회(1617, 1624), 통신사가 3회(1636, 1643, 1655) 파견되었다. 1609년 조선 후기 양국 관계의 토대가 되는 기유약조 체결, 1610년 무역시장 월 6회 확대, 1637년 양국 무역이 강화되는 겸대제 실시, 1643년 일본인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지 말라는 약조 체결, 1651년 일본으로 쌀이 수출되는 공작미제 실시 등의 조치가 있었다. 왜관 안에서도 일본인을 관리하는 관수(館守) 배정 및 외교사절 체계 등이 마련됐다.

일본 사절은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 가는 것이 금지됐고, 동래부사나 부산첨사 그리고 접위관 등 관료를 만나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외교현안을 논의했다. 이러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건물이 왜관 안에 들어섰다. 왜관 건물은 동관과 서관으로 크게 지어졌고 가운데에 일본 사절에게 연회를 베푸는 연향청(이후 왜관 밖으로 이전)이 들어섰다. 사절과 수행원이 묵는 숙소들이 조선 전기보다 크게 확충됐지만 왜관을 새로 지은 지 20년이 지나지 않아 숙소난이 심하게 일어났다. 경상도 관찰사가 “200~300명 정도의 일본인이 머물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는데, 1611년 700여 명, 1624년 1000여 명 등 왜관에 체류하는 일본인이 크게 증가한 탓이다. 일본 사절이 왔지만, 서관은 이미 찼고 임시 숙소도 지을 땅이 없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과 일본의 평화관계가 유지되고, 외교와 무역이 안정되면서 왕래하는 일본인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두모포왜관이 유지되는 동안 조선과 일본 관계에 필요한 많은 제도가 마련됐고 활발한 교류가 이어졌지만, 두모포왜관은 1678년 4월 초량으로 이전됐다.

양흥숙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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