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2019·사진)은 두 개의 가족으로 표상되는 두 개의 계급을 다룬다. 남루한 반지하에 거주하는 빈민 가족 반대편에 언덕길의 고급 주택에 사는 상류층 가족을 배치한다. 공간의 높고 낮음을 통해 계급을 분할하는 수직적 배치와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선은 김기영의 ‘하녀’(1960), 반듯한 고급 주택가와 슬럼화된 빈민가를 통한 명료한 이미지의 대비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1963)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설정은 안이하게 다루었다간 평면적인 적대 구도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부유층은 퇴폐적이고 악하며 빈민층은 정직하고 선하다는 식의 이분법적 구도는 한국 대중 영화의 전형적 관습이며, 많은 창작자는 이 상투성에 기대어 손쉽게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려는 유혹에 빠진다. 봉준호는 다른 국면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기우(최우식)가 과외 선생으로 들어간다는 작위적인 사건의 발단부터, 두 계급을 한 공간에 묶고자 한 감독의 고민이 엿보인다. ‘하녀’의 중산층 가족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신분 상승을 꾀하는 식모와 충돌하며, ‘천국과 지옥’의 기업인 곤도는 교도소 면회실의 창문에서나마 유괴범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에서 두 계급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상류층은 빈민과 접촉할 어떠한 시·공간적 접점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박 사장(이선균) 일가가 지하실에 무엇이 있는지, 수몰된 빈민가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듯, 다른 공간을 점유한 이들에게 서민들이 겪는 비극은 딴 세상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것은 한 편의 우화이다. ‘기생충’은 연극적인 무대 세팅에서 바깥의 현실을 끌어들이고 함축하려 한 김기영 영화의 화법을 이어받아, 현대의 계급적 양상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살인의 추억’(2003)과 ‘괴물’(2006)에서 국가 장치의 중력에 짓눌린 민중을 다루었던 봉준호는 지배와 피지배의 단순한 구도를 버리고 복잡 미묘한 상황을 연출한다. 두 가족의 관계는 대립이 아닌, 자본을 매개로 한 암묵적 공조에 가깝다. 기우의 가족은 박 사장 댁에 기생하고, 박 사장 일가는 고용인이 제공하는 노동의 편의에 만족할 뿐 정체 따윈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생 내지 공생 관계는 ‘선을 넘지 않는’ 계급 구분이 지켜지는 한,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등장인물에게 선악을 묻는 건 무의미하다. 박 사장 일가의 매너와 착함은 풍요로운 물질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하며, 기우 가족의 악다구니는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목이 있기에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계급 관계를 다룬다는 소재의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봉준호의 관점은 이창동과는 전혀 다르다. ‘버닝’(2018)에서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인 종수는 벤을 살해함으로써 계급의식의 각성을 통한 ‘저항’의 함의를 전한다. 하지만 봉준호는 이들 계급이 무지한 게 아니며, 도리어 자신의 계급성을 영악하리만치 잘 알고 있기에 저항이 아닌 ‘기생’을 택하는 것으로 본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아(我)와 피(彼)의 구분은 쉽지 않다. 도리어 계급 투쟁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같은 계급끼리의 이전투구가 되어 훨씬 끔찍한 양상을 띤다. 오로지 자본만이 승리를 구가하는 가운데, 밑바닥의 삶과 그로부터 올라오는 구조 요청의 신호는 무시되고 은폐되며 잊힌다. 이것이 2010년대 우리 세계의 풍경이며 위기의 징후라고 ‘기생충’은 경고한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