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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들판·야산에 숨어 있던 신라를 만나다

경주 폐사지 탐방 여행

  • 국제신문
  • 이진규 전문기자 ocean@kookje.co.kr
  •  |  입력 : 2019-01-30 19:35:10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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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불국사·대릉원 등 명소들
- 겨울도 차량·관광객 넘쳐 어수선

- 효소왕 효심 품은 황복사지 석탑
- 연꽃무늬 새겨진 연화문 당간지주
- ‘당나귀 귀’ 설화 배경 구황동사지
- 일제강점기 아픔 서린 장항리사지 등
- 도심지 벗어나 흩어져 있는 옛 절터
- 시간 멈춘 듯한 이색적인 분위기
-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힐링돼

경북 경주라고 하면 불교 문화의 기념비적 유산인 석굴암이나 불국사, 야외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 남산, 대릉원을 비롯한 수많은 고분을 먼저 떠올린다.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이기는 한데 ‘관광지’가 돼 버린 이런 명소는 겨울에도 몰리는 차량과 관광객으로 어수선하다. 하지만 도심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경주의 숨은 모습을 만나게 된다. 들판 한가운데, 야산의 기슭에 무심하게 서 있는 석탑이나 주춧돌, 당간지주만 남은 경주의 절터를 찾았다. 신라 시대 경주에서는 가장 사람으로 북적이며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을 사찰이 지금은 가장 한적하며 쓸쓸한 모습을 보여준다. 찾는 이가 있건 없건 절터는 겨울 찬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토함산 동쪽 탑정천 골짜기를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면 가파른 비탈에 오층석탑이 서 있는 장항리사지를 만난다. 잎을 떨군 맞은편 산 사면을 배경으로 역시 무채색의 서 오층석탑과 부서진 동 오층석탑이 햇볕을 받아 따스한 온기를 풍긴다.
■낭산과 명활산 사이 들판에 흩어진 절터

경주 남산의 동쪽에는 야트막한 산이 드문드문 솟은 사이로 너른 들판이 자리 잡았다.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낭산은 선덕여왕릉이 있는 곳인데 이 산의 끝자락 보문평야를 바라보는 곳에 황복사지가 있다. 멀리서 본 절터는 국보 제37호인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제외하고 푸른색의 커버가 덮고 있다. 지난해 12월 시작해 석 달로 예정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왕실과 관련된 사찰로 추정하지만 1000년이 넘는 세월은 모든 자취를 지우고 석탑과 주춧돌 몇 개만 남겨두었다.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웠다는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평범해 보이는 기단과 탑신의 실루엣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풍긴다.
번잡스러운 경주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야산의 비탈이나 텅 빈 들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옛 절터를 만나게 된다. 보문사지 당간지주.
황복사지에서 멀리 남동쪽 명활산 자락과 가까운 보문들판을 바라보면 누렇게 그루터기만 남은 논 가운데 살짝 솟은 당간지주가 바라보인다. 진평왕릉을 거쳐 가다 보면 먼저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안내판이 나온다.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농로를 잠시 내려가면 논 가운데 키 작은 당간지주가 나타난다. 보물 제910호인 이 당간지주에는 양쪽에 꽃잎이 8개인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키가 작은 건 아랫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어서다. 여기서 남쪽으로 400m 떨어진 지점에는 사적 제390호로 지정된 보문사지가 있다. 역시 농로를 한참 걸어가면 살짝 솟은 둔덕에 금당 터와 주춧돌이 있고 그 앞 좌우에 목탑 터가 서 있다. 금당 터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가까이 우뚝 솟은 당간지주와 멀리 황복사지 삼층석탑, 아름드리 고목이 둘러싼 진평왕릉을 시야에 담을 수 있다. 흙길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따라가면 보물 제64호인 화강암 석조(돌 물통)와 보물 제123호인 보문사지 당간지주를 차례로 만난다. 이 당간지주는 땅에 묻힌 부분이 없어 멀리서도 확연하게 눈에 띈다.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황복사지와 삼층석탑.
낭산의 북쪽 드넓은 황룡사지와 4차로 도로를 건너 마주 보는 자리에는 규모로는 비교할 바가 아닌 자그마한 구황동사지가 있다. 밭 가운데 돌무더기로만 보이는 이곳에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모전석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서진 탑신 사이에는 감실의 4개 문을 지키던 인왕상이 세월을 이기지 못해 무뎌진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절터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인 신라 경문왕과 관련된 곳이다. 그의 두건을 만들던 복두장이 죽기 전 도림사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는데 그 도림사 터가 이곳이라고 한다.

■보문단지 배경으로 선 삼층석탑

부서진 구황동사지 모전석탑의 인왕상.
경주의 휴양지구인 보문호를 남쪽으로 돌아가면 4번 국도를 지나며 경주월드의 놀이기구가 돌아가고 관광객들이 지르는 함성이 들린다. 여기 놀이기구가 가까이 바라보이는 명활산 자락 천군동에 천군리사지와 동서 삼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이 발굴 조사했는데 당시 무너져 있던 동서 2기의 탑을 지금 상태로 복원했다고 한다. 절터는 사적 제82호로, 삼층석탑은 보물 제168호로 지정됐다. 서라벌초등학교 담장에서 멀지 않은 이 절터는 분잡스러운 유흥지구에 붙어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농로와 밭 사이에 끼어 궁색해 보이지만 밭일하는 마을 사람 곁을 지키며 마을 풍경의 하나가 되어 있다. 석탑 주변은 바로 갈아놓은 밭이라 간신히 탑돌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밖에 없다. 동쪽으로는 경주문화엑스포공원의 경주타워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일제강점기 아픔 서린 토함산의 숨은 보석

천군리사지 서 삼층석탑.
경주 시내에서 토함산을 관통하는 추령터널을 지나거나 4번 국도를 따라 새로 뚫린 토함산터널을 지나 장항리에 접어든 뒤 다시 탑정천 골짜기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토함산의 숨은 보석을 만난다. 가파르고 좁은 오르막 도로를 10분 정도 올라가면 계곡 건너 산비탈의 옅은 노란색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장항리사지의 서쪽 오층석탑이다. 도로에서 올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절터로 가는 길은 제법 품을 팔아야 한다. 아래로 내려가 계곡을 건넌 뒤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설치한 지 오래된 계단은 난간이 흔들리고 발판은 군데군데 못이 빠져 있다.

절터에 올라서면 동·서 오층석탑과 석조 대좌가 맞는다. 아래에서 석탑이 하나만 보이는 건 동 오층석탑은 파괴돼 있기 때문이다. 그 옆의 석조 대좌도 마찬가지다. 부서졌다는 말보다 파괴됐다는 말이 적확한 게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일본인을 포함한 도굴범들이 탑 속 사리장치를 훔치려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기 때문이다. 높이 10m에 이르는 서 오층석탑은 5년 뒤 복원해 다시 세웠고 동 오층석탑은 부서져 아래 계곡에 흩어진 부재를 모아 둔 것이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석조 대좌도 함께 부서졌는데 대좌 위에 모셔졌던 석불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북쪽 뜰에 전시돼 있다. 장항리사지는 살짝 뒤로 물러서면 동서 석탑이 잎을 떨군 산비탈을 배경으로 초연하게 선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에서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냥 좋을 듯하다.

글·사진=이진규 전문기자 ocean@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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