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리랑카에 최초로 세워진 사원
- 왕자·하녀의 위대한 러브스토리
- 입구에서 안내판으로 먼저 소개
- 코끼리·붓다 족적 등 조각 지나
- 부처님 사리 모신 기념불탑 돌면
- 현장법사도 머물렀던 수도원 등장
- 승려 간 종교 권력 중심지되기도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왕국(Anuradhapura·BC 377~AD 1017년)의 수도 아누라다푸라는 불교의 성지라고 일컬어진다. 그 전설을 BC 247년 불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 서사시 ‘마하왕사-스리랑카의 위대한 연대기’는 사실인 것처럼 전승한다. 서사시는 붓다의 세 차례 스리랑카 방문(BC 528년·523년·520년)에서 시작하여 남방불교 종주국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 지위는 붓다 사후에 불경의 내용을 함께 암송하여 공인하고 교의의 논란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네 번째의 모임, 4차 결집이 마하 비하라야(Maha Viharaya)에서 열려 최초의 팔리어 경전이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완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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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방 소승불교의 출발점이 된 마하 비하라 입구 . |
■ 남녀 사랑과 붓다 족적 사이
그 전설 속의 사실을 찾아보고자 길을 나선다. 그 길의 출발점이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 이수루무니야 비하라(Isurumuniya Viharaya)이다. 승려들의 거주지인 승원, 혹은 동굴 승원을 찾아가는 안내 표지판에서 먼저 만난 것은 ‘이수루무니야의 연인’이다. 돌조각으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그 연인의 상은 두투가무누 왕(Dutugemunu·BC 161~137년)의 외아들로 왕권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한 살리야(Saliya) 왕자와 하녀 아소카말라(Ashokamala)를 조각한 것이다. 그 사랑은 스리랑카의 가장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영화, TV 드라마, 발레, 연극, 유행가 등 대중문화와 문화상품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진다.
동굴 승원에서 직접 만나는 것은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벽면의 조각들이다. 불법의 수호와 지혜, 힘, 부를 상징하는 코끼리 조각, 무슨 상념에 사로잡힌 듯 먼 곳을 보고 있는 왕 등 조각을 곁눈질할 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붓다의 족적, 발바닥 조각이다. 안내표지판에서는 남녀 간 사랑의 몸짓으로 시작하면서 승원에서는 붓다의 족적으로 마무리하고자 한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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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권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한 왕자의 부왕 두투가무누 왕의 조각상. |
그 의미를 도저히 헤아리지도 못하고 도착한 곳은, 우리에게 흔히 대사(大寺)로 알려졌지만 수도원으로 설립된 마하 비하라(Maha Vihara)이다. 띳사 왕(Tissa·BC 307~267년)의 통치 시기에 설립된 수도원은, 테라바다(Theravada) 불교의 초석을 놓은 붓다고사(Buddhaghosa·생몰연대 미상)에 의하여 당시 남아시아에서 가장 체계적인 승가대학이 된다. 이름이 붓다의 소리라는 뜻을 지닌 그가 쓴 ‘정화의 길’(비주디마가·Visuddhimagga)이 최고의 경전이 된다. 그 경전의 부제 ‘명상의 주제를 위한 주 텍스트’와는 달리, 수도원과 사찰 경내는 명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순례자들, 신도들에 의해 떠밀려서 온 곳은 자야 스리 마하보디(Jaya Sri Maha Bodhi), ‘신성한 보리수나무’이다. 나무는 마힌다 왕자(Mahinda·BC 285~205년)와 함께 불교를 전래하려고 온 누이 상가미타 테리(Sangamitta Theri·BC 282~202년)가 가져온 것이다. 그 나무는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깨우침을 얻게 된 붓다에게 그늘을 드리운 보리수나무의 가지이다. 보리수나무의 그늘은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는 신도들에게 깊고 깊게 드리우지만 ‘이수루무니야의 연인’과 붓다의 족적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햇살도 가려주지 않는다.
■ 수도원은 권력중심 ·교육 기관
‘이수루무니야의 연인’인 하나뿐인 왕자를 잃은 두투가무누 왕(Dutugemunu)이 세운 루완윌리사야 탑(Ruwanwelisaya Dagaba·BC 140년)으로 가서 그 의미를 물어볼까. 왕은 왕권보다 사랑을 선택한 왕자를 통해서 권력의 무상을 느끼고 더욱더 불교에 심취한 것인가. 왕은 부처님의 치아 사리와 유물들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대 기념탑의 하나로 모신다. 그 탑은 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모델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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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현장법사가 머물렀던 수도원 아바야기리 비하라. |
사리와 유물을 모실 때처럼 탑 주위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발랑가바 왕(Valagamba·BC 103~77년)이 세운, 우리에게 무외산사(無畏山寺)로 알려진 수도원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ara)로 발길을 돌린다. 발랑가바 왕이 직전의 국왕 두투가무누 왕에게서 교훈을 얻었는지, 수도원은 종교 권력과 세속권력의 중심이 된다. 국왕과 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수도원은 팔리어로 된 불경을 원전으로 하여 테라바다 불교를 확립한 마하 비하라(Maha Vihara)의 소승불교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도 받아들이고, 대승불교의 하나인 밀교(Vajrayana)로 확산하여 외국 승려들, 중국, 자바, 카슈미르 등의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혜택을 당나라 초기 고승이자 불경 번역가인 현장법사(602년 4월 6일 ~ 664년 3월 7일)도 받는다.
권력과 사랑의 선택 문제에서 시작한 여정은 권력을 둘러싼 승려들의 대립, 권력과 종교 간의 관계 문제에 이른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 해결을 어떻게 하는지에 관해서 아누라다푸라의 승가, 수도원, 불상, 불탑 등은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초대하지도 않는다.
‘초대하지 않았어도 인생은 저 세상으로부터 찾아왔고/ 허락하지 않아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간다./ 찾아왔던 것처럼 떠나가는데,/ 거기에 무슨 탄식이 있을 수 있으랴.’(‘본생담’에서)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