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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숲을 거닐다 <14> 경주 계림(鷄林)

천년고도의 고목…하늘·땅, 생과 사 윤회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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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과 반월성 사이 평지 위
- ‘닭 울음소리가 난 숲’인 계림
- 경주 김씨 시조 탄생 설화 깃들어

- 느티나무 회화나무 왕버들 등
- 꺾이고 뒤틀려 고사한 듯한 거목들
- 거친 풍파와 맞서 싸운 증거 오롯
- 곡선의 산책로 숲 한복판 냇가도

이름난 숲에 가면 전설 혹은 이야기가 있다. 산속에 있는 자연림, 원시림보다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인공림의 전설과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롭다. 역사의 고장인 경북 경주를 대표하는 신성한 숲, 계림(鷄林)이 대표적이다. 신라 초, 아니 어쩌면 우리의 역사가 기록하지 못하는 때부터 있었을 최초의 숲이다. 첨성대를 찾았다 옆으로 눈길 한번 주면 발걸음이 멈추고 마는 계림에서 깊디깊은 숲의 묵직함을 담아봤다.
   
경북 경주의 계림은 천년 고도의 깊이를 더하는 명숲이다. 주름지고 뒤틀린 고목이 그림 같은 명암을 만들자 멀리 첨성대가 도드라지게 보인다.
■오래된 숲, 유구한 세월의 풍상

계림은 경주 중심부 대릉원과 반월성 사이 경사가 없는 평지에 있는 오래된 숲이다. 멀리서 계림을 바라보면 초록빛이 세 가지 형태로 보인다. 시퍼렇다고 할 만큼 채도가 높은 잔디밭과 연둣빛으로 옷을 입은 고분, 그 사이로 숲의 절대 이미지인 전형적 초록빛을 띤 계림이 보인다. 악명 높은 경주의 폭염이 맹위를 떨친 날, 유독 깨끗했던 파란 하늘이 색을 선명하게 해주는 데 힘을 보탰다. 계림은 경주향교와 교촌마을에서 들어가거나 반대편 첨성대로 가는 통행로를 이용하면 된다.

계림으로 들어가니 가히 숲은 숲이었다. 지열과 직사광선이 없는 숲은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더위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을 비웃듯 숲속에 바람이 불어온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지치고, 뒤틀리고 갈라진 고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가지나 줄기가 떨어져 나간 것인지, 잘린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형상인데, 더위 앞에 지치거나 찌푸린 오만상을 한 인간의 모습을 투영한 듯하다. 왕버들을 보니 꼭 시원한 수박을 손에 들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계시던 할아버지를 닮았다. 신라 시대부터 보호된 숲이어서일까. 느티나무, 회화나무, 왕버들, 물푸레나무 등 짙은 녹음을 보이는 계림에서 부러지거나 휘어진 모습의 고목은 한두 그루가 아니다. 자그마치 100여 그루의 고목이 이 숲에 있다고 한다. 수명을 다하고 고사한 흔적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고목 사이로 저 멀리 첨성대가 보였다. 주름지고 뒤틀리고, 이끼 낀 줄기의 고목은 그림 같은 명암을 만들어 첨성대를 도드라지게 볼 수 있었다.
   
계림의 전경. 잔디밭과 고분, 숲이 저마다의 선명도를 갖고 삼색의 초록빛을 발산하고 있다.
■신성한 숲, 생명의 탄생과 소멸

주말이면 계림은 사람 반, 나무 반이다. 그런 계림에서 사람 만나기가 어려웠으니 숲 한복판을 따라 흐르는 냇물 소리가 들릴 정도다. 꼬불꼬불 냇물의 정취가 폭염 속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시원함을 선사했다. 물이 있는 곳, 역시 왕버들이 냇가를 따라 자리했다. 가지를 굽혀 절로 냇가의 다리를 만든 고목은 건너편에서 다시 일어서는 ‘N자’ 형상을 하고 있다.

계림은 한자 그대로 ‘닭의 숲’이다. 신라 탄생 설화, 신화가 만들어진 영험하고 신성한 숲이다. 삼국유사 등을 보면 서기 65년 신라 탈해왕이 이 숲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나자 사람을 보냈더니 나뭇가지에 금빛의 궤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탈해왕이 직접 숲으로 와 금궤를 여니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고, 이 아이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성은 ‘김(金)’, 이름은 신라 말로 아이를 뜻하는 ‘알지’로 불린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계림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 56명의 왕 중 38명이 경주 김씨였으니 신라 왕실의 본산이 계림인 셈이다.

   
계림의 명물 회화나무. 수령이 1300여 년으로, 하부의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계림은 경북 성주 성밖숲 정도의 아담한 규모여서 동선이 따로 없다. 숲길이 몇 갈래지만 평지여서 모든 길을 다 걸을 필요가 없다. 그래도 냇가를 건너 첨성대에서 이어지는 길까지는 걸어야만 이 숲의 명물인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회화나무는 나무 한 그루가 아닌 그루터기와 앙상한 껍데기, 그것도 황량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다. 수령이 1300여 년이라고 적힌 이 회화나무를 고사했다고 봐야 할지, 고사 직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삼국유사 등 기록으로 돌아가면 어찌 됐든 이 숲은 2000년도 훨씬 이전인 65년부터 있었다. 한때 1300년 전 이 회화나무도 싱싱하고 파릇했던, 그래서 눈부신 청춘을 뽐냈을 테고, 이름 모를 고목들도 나름의 전성기를 구가했을 텐데 애처롭고 아련한 마음이 생긴다. 계림의 본래 이름은 김알지의 탄생, 생명이 태어났다는 의미로 시림(始林)이었다고 하니 유구한 세월이 흐른 계림의 풍상을 이 회화나무가 대변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림이 있어 천년 고도 경주의 깊이가 더해졌다. 글·사진=송진영 기자 roll66@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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