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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숲을 거닐다 <11> 경남 고성 장산숲

빛나는 신록·단아한 정자·연꽃의 군무 … 어서오라 속삭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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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년 전 풍수 결함 보완하려 조성
- 숲 중앙에 연못·작은 섬 품격 높여
- 느티나무·서어나무·배롱나무 사이
- 수령 짐작조차 어려운 고목 눈길
- 화가들 곳곳 자리잡고 풍경을 화폭에
- 드라마 ‘구르미…’ 촬영지로도 유명

숲이 가장 빛날 때는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다. 짙어진 녹음에 온 신경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5월이 지나면 여름이다.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아쉽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봄은 더하다. 혹독한 겨울 추위와 지독한 여름 더위 사이 다시 봄을 만나기 위해선 이 모두를 견뎌내야 하니 말이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꼽힌 고성 장산숲에서 봄의 끝자락, 빛나는 신록으로 물든 한 폭의 그림을 만났다.
   
경남 고성군 마암면 장산숲의 상징인 정자 주변을 촘촘하게 둘러싼 연잎 사이로 ‘물속의 진주’ 연꽃이 보인다.
■화가들이 함께하는 숲

경남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에서 장산숲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마암면사무소에서 개천면 방향으로 3분 정도 달리다 보면 멀리서 봐도 넓은 대지 한쪽에 있는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기에 시퍼렇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선명한 초록색이 우거져 있으니 의심의 여지 없이 그곳으로 향하면 된다. 그런데 숲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명성에 비교해 규모가 적다는 느낌이다. 경남 밀양 위양못의 4분의 1도 안 되는 크기. 숲으로 들어가기 전 ‘아차’하는 생각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이따위 불안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팔레트와 스케치북을 든 ‘화가’들이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도시락을 먹으면서 쉬엄쉬엄 붓을 잡는 50대 여성 화가들부터 ‘썸’인지 연애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는 20대 남녀 화가들도 있었지만 고독한 화가도 여럿이다.

   
장산숲을 찾은 한 어린이가 숲의 ‘키 낮은 돌탑’에 또다른 돌탑을 쌓고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86호인 장산숲은 약 600년 전 조선 태조 때 호은 허기 선생이 마을에 바다가 비치면 번쩍번쩍해 좋지 않다는 풍수지리적 결함을 보완하고자 조성했다. 경북 성주군 성밖숲과 같은 비보림(裨補林)으로, 2009년 전국 아름다운 숲으로 꼽히기도 했다. “숲의 중앙에는 연못을 파고 그 한가운데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작은 섬을 조성해 숲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는 장산숲의 안내 표지판 소개문처럼 인공 정자가 있는 작은 섬을 중심으로 한 이 숲은 정말 아름답다.

숲으로 들어갔다. 못을 따라 숲을 걸었는데, 논과 못을 구분하는 둑과 같은 길로 먼저 걸었다. 반대편은 넓은 뜰이 있는 길인데, 못을 중심으로 한 장산숲의 절경을 보기에는 걷기가 다소 불편해도 둑길이 훨씬 낫다. 못의 중앙, 정자를 보고 조금 가니 장산숲 못의 상징인 연꽃이 정자 주변을 촘촘하게 둘러싼다. 못에 드리운 장산숲의 잔영과 정자, 연꽃을 한데 담을 수 있는 사진 촬영도 둑길에서 가능하다.

못과 연꽃을 빼놓고서는 장산숲을 설명할 수 없다. 어린이가 못에 던진 돌멩이에 두꺼운 연잎의 몸놀림이 더해지면서 평온했던 수면이 일렁이더니 물속의 진주, 연꽃이 보인다. 기대하지 않아서일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직은 어색한, 그래서 수줍은 듯 웃는 모습이다. 돌다리를 건너 정자로 가니 주변에 성미가 급한 백련이 초록 바탕의 연잎에 흰 점을 찍은 듯 혹은 그 위에 똬리를 튼 형상으로 못에 내려앉아 있었다. 못의 3분의 1을 뒤덮은 연잎을 보니 다음 달 말에 이 못에서 펼쳐질 연꽃의 군무, 그 풍경과 정취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특히 장마철 굵은 빗방울이 연꽃과 주변 못물을 두드리는 장면은 사진작가 사이에서 장산숲의 절대 비경으로 손꼽힌다. 돌다리 앞에는 배우 박보검이 김유정에게 “네 소원 이뤄달라는 게 내 소원이다”라는 유치하면서도 멋진 대사를 남겼던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촬영을 알리는 표식이 서 있다.
   
입구에서 바라본 장산숲. 연잎과 수목의 연두와 초록빛이 윤기가 흐를 만큼 너무나 선명하다.
■‘고상·담백’ 아담하다의 정석

조선 시대 처음 숲을 조성했을 때만 해도 길이가 1000m에 이르렀던 장산숲은 현재 길이 100m, 너비 60m 정도만 남아 있다. 숲보다는 뜰로 불러도 될 정도. 10분이면 못 주변을 걸을 수 있고, 숲이 만든 뜰은 어린아이가 뛰어놀아도 될 정도로 걸림돌이라곤 하나 없었다. 평석으로 만든 넓디넓은 평상은 숲의 편안함을, 돌다리를 건너야 만나는 정자는 숲의 운치와 멋을 더했다. 수목도 예사롭지 않았다. 숲에는 250여 그루의 느티나무, 서어나무, 긴잎이팝나무, 소태나무, 검노린재나무, 배롱나무, 쥐똥나무 등 사이로 수령을 짐작하기도 어려운 고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검은색에 가까운 기둥과 짙디짙은 녹음으로 무장한 수목 사이로, 생기를 잃은 채 기둥이 메말라 잿빛보다 더 하얀 고목이 더욱 도드라진다. 개미조차 매정한 나머지 이제 더는 자랄 수 없는 고목에 오르지 않았으니 보는 이가 섭섭할 정도다.

장산숲이 주는 색감, 이른바 채도는 압권이다. 색상 명도와 함께 색의 3속성인 채도는 색의 순수하고 선명한 정도를 말한다. 이 숲의 연두와 초록빛이 주는 선명함과 윤기는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채도’를 검색해 봤을 만큼 너무나 강렬했다. 그러고 보니 ‘고독한 화가’들이 자리한 곳이 바로 이 숲에서는 절대적인 사진 촬영 명소였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깥에서는 습도를 양껏 머금은 후텁지근한 바람이었을 텐데, 장산숲의 바람은 아직 봄기운이 물씬했다. 국어사전은 ‘아담하다’의 뜻을 ‘고상하면서 담백하다’와 ‘적당히 자그마하다’로 정리한다. 아담하다의 용례는 십중팔구 후자. 하지만 이곳 장산숲은 전자의 의미까지 아담하다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장소였다. 글·사진=송진영 기자 roll66@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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