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금강산 자락의 불국사 말사

- 이차돈 순교 때 우윳빛 피 솟자 백성들 애도
- 이듬해 그 자리 법흥왕이 절 세워

- 임진왜란 때 폐허 1600년께 재건

- 김생이 쓴 순교비와 금동약사여래입상
- 박물관으로 옮겨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같이 평안하시리다." 삼국유사에 남은 기록 중 이차돈이 불교를 위해 순교하면서 한 말이다. 아도 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0년 지난 527년의 이야기다.

이차돈 순교지에 세워진 백률사 범종각과 대웅전.

가을이 깊어가는 때 경주 소금강산(177m) 자락에 있는 고즈넉한 사찰 백률사를 찾았다. 이곳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다.

백률사는 신라가 불교를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차돈(502~527)의 생애와 맞닿아 있다. 법흥왕 14년(527)에 불교 전파를 위해 이차돈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슬퍼하자 다음 해인 528년에 법흥왕이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자추사(刺楸寺)로 불렀다가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시대에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쉽게 이름을 바꿨는데 자추가 백률로 바뀐 것은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출발하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경주IC로 빠져나온다. 이어 구황로길로 9㎞ 남짓(10여 분 소요) 가면 탈해왕릉이 나오고 바로 다음에 백률사 이정표를 만난다. 경주역에서 경주시청을 지나도 된다. 요즘은 주말에도 예전보다 도로가 한산한 편이다. 백률사 들머리에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백률사로 향한다. 잘 정비된 산책로를 걷다 가파른 길로 접어들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진 길이다. 양쪽에서 살짝 기운 대나무가 마치 터널처럼 머리 위를 아늑하게 덮고 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소나무는 줄고 대나무가 많아진다. 경사에 압도돼 다리에 바짝 힘을 줬지만, 거리가 가까워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짧지만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차돈의 삶의 무게에 비해서는 소박한 사찰이다. 대웅전과 삼성각, 선원 건물이 전부다.

대웅전 내부. 불상 왼쪽 벽에 이차돈 그림도 있다.

이차돈은 법흥왕 시대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朴)이며 이름이 염촉(厭觸)이다. 염촉은 한자식 이름으로 염은 신라 말로 이차(異次)이고, 촉은 돈(頓)이라 한다. 아버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할아버지 아진찬 종(宗)은 곧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은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로 이차돈을 왕족으로 보는 이유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차돈 순교비.

원래 백률사 입구에는 이차돈 순교비가 서 있었다. 이 순교비는 법흥왕 14년(527) 불교의 융성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고자 그로부터 290여 년이 지난 818년에 세운 공양비다. 육면체의 특이한 기둥 형식으로 다섯 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해 비문은 거의 읽을 수 없다. 다만 판독할 수 있는 단어들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차돈의 순교 기록과 일치한다.

비문은 창림사 비문 글씨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김생은 성덕왕 10년(711)에 태어나 팔십 평생 붓 들기를 쉬지 않았으며 예서와 초서 할 것 없이 신필로 인정받았다. 나머지 한 면에는 긴 머리채가 하늘로 쭈뼛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이차돈의 목에서 흰 우유가 솟아오르고 하늘에서 꽃 비가 내리는 모습을 돋을새김한 것이다. 복장도 특이해 통치마 같은 하의에 허리까지 덮이는 상의인데 신라 복식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어 여기서는 볼 수 없다.

통일신라 3대 금동불 중 하나인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 백률사 대웅전에 봉안돼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현덕왕 9년(817)에 이차돈을 추모해 석당이 세워졌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이 절을 1600년께 경주 부윤 유능순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 동쪽 암벽에 삼층탑이 음각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탑의 형태로 추정되는 무늬가 보이지만 상륜부를 제외하면 알아보기 힘들다는 평가가 많다.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 암벽에 만들었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지붕돌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은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3대 금동불로 알려져 있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처음 보시죠, 바위 네 면의 불상…굴불사지에 조각된 사방정토

경주 동천동 소금강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앞에서 한 불자가 합장하고 있다.

백률사를 찾을 때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백률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121호)이다. 높이 3m의 커다란 바위 사면에 여러 보살상이 조각돼 있다.

원래 남북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다. 사방불의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라의 사방불은 대체로 서쪽에 아미타불, 동쪽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신다.

이곳 사면석불도 이 같은 배치를 따르고 있다. 서쪽에 아미타삼존불, 동쪽에 약사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또한 남쪽에는 삼존입상이 있었지만 하나는 흔적도 찾기 힘들고 하나는 얼굴 부분이 훼손돼 있다. 일본인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보살상 두 분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 보살입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왼쪽의 십일면관음보살입상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았다. 십일면 관음보살상은 얼굴이 열하나에 팔이 여섯 달린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이곳 사면석불은 남산의 칠불암, 안강 금용사터의 사방불과 함께 신라의 사방불 신앙을 알려주고 있다. 파주 마애사면석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6호)과 충남 예산군 화전리 사면석불(보물 제794호) 등도 사면불상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방불의 신령함을 아는지 우리가 찾은 날에도 몇몇 불자가 지극한 마음으로 굴불사지를 찾아 석불상 면마다 합장하기도 했다.

굴불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남아있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백률사에 나들이하는 도중 이 근처를 지나는데 땅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왕에겐 그것이 경 읽는 소리처럼 들렸다. 왕은 대번에 신하에게 명해 그곳을 파보게 했다. 그러자 거기서 각 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나왔다. 이에 감동한 왕은 석불을 파냈다고 해서 굴불사라는 이름의 절을 지었다. 약간 다르게 삼국유사에서는 이 바위가 나오자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겼다고 전하고 있다. 1985년 발굴 조사에서 고려 시대의 건물터가 확인됐는데 출토 유물 가운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금고에는 굴석사라는 명문이 있다.

유정환 기자 defiant@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