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균의 누이이자 천재인 허초희
- 혼인 후 남존여비 봉건적 질서에 갇혀
- 독수공방·시집살이·자식 둘 죽는 등
- 지옥 같은 삶의 외로움·슬픔 시로 달래

- 불타지 않고 전해지는 210수의 시 중
- 절반 이상이 현실 아닌 신선세계 노래
- 12년간 몽환적인 이상향에 빠져 살아

"그는 봉래섬을 떠나 인간세계로 우연히 귀양 온 선녀다. 그가 지은 시들은 모두 아름다운 구슬이 되었다." 1606년 3월, 조선에 사신으로 온 중국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은 선물 받은 조선 여류시인의 시집에 이런 서문을 붙였다. 시집은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 ~ 1618)이 엮은 누이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1563~1589)의 '난설헌집'.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자리한 난설헌 생가. 안채, 사랑채, 곳간채가 'ㅁ' 자 형태로 배치된 이 한옥은 울창한 솔숲에 둘러싸여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되는 난설헌의 시는 중국 문단에 소개돼 문명을 떨쳤다. 난설헌집에 실린 시는 모두 210수. 그 가운데 신선세계를 노래한 시가 100여 수로,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 난설헌은 15세 때 시집가서 27세로 요절하기까지 12년간 현실보다는 몽환적 이상향에 빠져 살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난설헌은 타계 전 써놓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극단적 현실 부정의 모습마저 보였다. 우리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편의 하나로 꼽히는 그의 작품들이 자칫 사라질 뻔한 상황이었다. 누이의 시를 상당수 외우고 있던 교산 덕분에 난설헌의 절창은 햇빛을 보게 됐다. 난설헌은 왜 세상을 등졌을까? 지난 6, 7일 난설헌 시의 산실인 강원도 강릉과 경기도 광주를 찾아 그의 삶을 되돌아봤다.

■혼인이 가른 삶의 봄과 겨울

난설헌 초상.

난설헌의 27년 짧은 삶은 남편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한 1577년을 기준으로 그 전과 후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혼인 전이 백화가 만발한 봄이라면, 혼인 후는 삭풍이 휘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난설헌의 14년 '봄 인생'은 그가 나고 자란 강릉시 초당동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곳 울창한 솔숲 속에 난설헌 가문의 고택이 있다. 먼저, 고택 앞 시비에 새겨진 그의 시를 보자.

'내 집은 강릉땅 돌 쌓인 냇가에 있어(家住江陵積石磯·가주강릉적석기)/문 앞으로 흐르는 물에 비단옷을 빨았다네(門前流水浣羅衣·문전유수완나의)/아침이면 한가로이 목란배 매어 놓고는(朝來閑繫木蘭棹·조래한계목란도)/쌍쌍이 나는 원앙 부럽게 바라봤지(貪看鴛鴦相伴飛·탐간원앙상반비)'.('죽지사(竹枝詞)·3')

고졸한 아취 어린 고택을 나서 솔숲 사이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100m쯤 가면 하천이 나온다. 하천은 경포 바다로 흐른다. 하천가에 서면 해변은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건물 너머로 푸른 물마루가 넘실거린다. 하천을 건너면 둘레 4.3㎞에 이르는 드넓은 경포호가 펼쳐진다. 호수 안 바위섬에 조촐한 정자가 그림처럼 서 있고, 서쪽 멀리 겹겹 주름진 희뿌연 산들이 아스라이 뻗어 나간다.

개발 바람을 비켜 간 고택 일대 풍경은 고즈넉하고 그윽하다. 난설헌은 이곳에서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 큰 오빠 악록(岳麓) 허성(許筬·1548∼1612), 작은 오빠 하곡(荷谷) 허봉(許봉·1551∼1588), 남동생 교산과 더불어 '허 씨 5문장'으로 불리는 문인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그는 8세 때 벌써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명문을 지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난설헌집. 난설헌을 존경한 중국 시인 허경란이 난설헌의 시에 화운해 지은 시들을 묶은 '소설헌집'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타고난 천재성에다 당대의 명문장가 하곡과 대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이 난설헌의 시문 스승이었으니,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성장하는 건 정해진 길이 아니었을까. 여동생의 재능을 무럭무럭 키워주는 이런 집안 분위기는 남존여비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여성에 대한 교육을 금기시했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사회환경과 대척점에 선 별천지였다.

하지만 난설헌의 봄날은 혼인과 함께 종말을 고한다. 그 후의 삶은 기나긴 겨울이었다. 남편은 10여 년 낙방을 거듭한 끝에 난설헌이 죽던 해 겨우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재능이 아내에게 뒤졌다. 아내에 대한 열등감 탓인지 남편은 집 밖으로 나돌았고, 난설헌은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시로 달래야 했다.

'비단띠 비단치마에 눈물자국 쌓인 것은(錦帶羅裙積淚痕·금대나군적루흔)/해마다 봄풀 보며 님 오시길 바랐기 때문일세(一年芳草恨王孫·일년방초한왕손)/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으니(瑤箏彈盡江南曲·요쟁탄진강남곡)/배꽃은 비에 지고 한낮에도 문은 닫혔네(雨打梨花晝掩門·우타이화주엄문)'.('규원(閨怨)·1')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난설헌의 고독이 시에서 뚜렷이 떠오른다.

난설헌은 당초 남편의 출세를 돕는 지혜로운 아내가 되려 한 듯하다. 그의 자 '경번(景樊)'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경번은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한 명인 초장왕(楚莊王)의 부인 번희(樊姬)를 경모한다는 뜻이다. 번희는 초장왕이 인재를 얻어 천하를 제패하도록 내조했던 여인이다. 그러나 자꾸 아내에게서 멀어져 가는 남편을 둔 난설헌은 그럴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지옥 같은 현실서 신선세계로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경수산 기슭에 있는 난설헌 묘소. 왼쪽 끝에 난설헌 자녀의 무덤이 보인다.

아들이 겉도는 이유를 며느리의 잘못으로 여긴 까닭인지 난설헌에 대한 시어머니의 시선 또한 냉랭했다. 고부간의 불화는 난설헌의 시집살이를 더욱 어렵게 했다. 불행은 불행을 부르는 것일까. 난설헌은 급기야 두 자식을 먼저 보낸 데 이어 태아마저 잃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까지 겪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경수산 기슭의 난설헌의 묘소 앞에 세워진 시비에서 그 절절한 슬픔을 읽을 수 있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올해는 남은 아들마저 잃었네(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슬프디슬픈 광릉의 땅이여(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두 무덤 마주 보고 서 있구나(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肅肅白楊風·숙숙백양풍)/솔숲에선 도깨비불 번뜩이는데(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종이돈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紙錢招汝魄·지전초여백)/너의 무덤 위에 술을 붓는다(玄酒尊汝丘·현주존여구)/너희 남매의 가여운 혼은(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밤마다 정겹게 놀고 있겠지(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뱃속에 아이가 있지만(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어찌 제대로 자랄 수 있으랴(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피눈물 속으로 삼킨다(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곡자(哭子)')

이보다 슬픈 시가 있을까. 난설헌에게 광릉 땅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묘소 왼쪽에는 앞서 보낸 남매의 작은 무덤들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피어 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맑디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에 부치노라." 무덤 앞에는 난설헌보다 6개월 먼저 세상을 떠난 작은 오빠 하곡이 쓴 조카의 묘지(墓誌)가 세워져 있어 더욱 애처롭다. 난설헌 모자의 묘소 앞 지척에 뚫린 중부고속도로로 차들이 무정하게 쌩쌩 달린다.

난설헌 생가 앞 경포호.

난설헌은 별세 4년 전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썼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碧海侵瑤海·백해침요해)/파란 난새가 무지개색 난새와 어울렸네(靑鸞倚彩鸞·청난의채난)/연꽃 스물일곱 송이(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붉게 떨어지니 달빛 어린 서리 차갑구나(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1585년 상을 당해 외삼촌 댁에 머물 무렵 꿈에서 바다 가운데 구슬과 옥으로 형성된 광상산에 올라가 본 것을 묘사한 시다. 셋째 시구의 '삼구'는 27세(3×9), 넷째 시구의 '타'는 죽음을 상징한다.

난설헌은 당시 이미 현실을 벗어나 신선세계로 도피한 지 오래였다. 이 시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신선사상에 대한 몰입은 87수에 달하는 '유선사(遊仙詞)' 연작시를 낳았다. 그중 44번째 시를 보자. '고래 탄 한림학사 백옥경에 예 올리니(騎鯨學士禮瑤京·기경학사예요경)/서왕모 반기며 푸른 성에서 잔치 벌렸네(王母相留宴碧城·왕모상유연벽성)/무지개붓 손에 쥐고 옥 자를 쓰니(手展彩毫書玉字·수전채호서옥자)/취한 얼굴 청평조 바칠 때 같아라(醉顔猶似進淸平)'.

난설헌 생가 주위의 솔숲.

첫째 시구의 '학사'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701~762)을, '요경'은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의 수도인 백옥경을 뜻한다. 이백은 죽은 뒤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둘째 시구의 '왕모'는 불사약을 가진 선녀 서왕모를, 넷째 시구의 '청평'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모란을 보고 놀면서 이백에게 짓게 했던 악부체 시 청평조를 말한다. 난설헌은 꿈에서 시선(詩仙) 이백을 만난다. 아니, 이백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남존여비의 현실을 상상으로 혁명한 유토피아였다.

난설헌에게는 한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에 태어난 것과 여자로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어떨까? 난설헌과 다를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아직도 직장에서 고위직에 오른 여성이 뉴스의 대상이 되거나 여성노동이 가장 값싼 대우를 받는 등 숱한 남녀 불평등 사례가 그 답이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