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세 때 출가 위해 집 나선 사명당
- 그를 기린 표충비 인근에 생가 보존

- 깨달음 얻고 임란 때 승병 조직
- 日 건너가 3000명 포로송환 활약도

- 말년 보낸 홍제암 뒤 산기슭엔
- 다른 승려보다 초라한 부도 남겨

"늘 자기 허물을 살피되 결백과 정직을 체(體)로 삼고, 사상과 인내를 용(用)으로 삼으며, 푸른 산과 흰 구름을 사는 곳으로 삼고, 물과 달과 솔바람을 마음의 벗으로 삼아라."

스승의 당부에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서슬 퍼런 임제의 선풍이 꿈틀대고 있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가며 존재의 진면목을 보라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주문이었다.

제자는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백척간두에 선 심정으로 용맹정진한 끝에 견성의 문을 열었고, 그 깨달음은 도탄에 빠진 백성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는 보살행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스승 청허당(淸虛堂)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고 일본에 잡혀간 3000여 명의 백성을 구해낸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1544~1610)의 이야기다.

	해인사 홍제암 뒤편 사명당 부도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 본 홍제암. 사명당은 이 암자에서 말년을 보내다 입적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 사명당의 삶은 이 여덟 자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을 비워 중생을 보듬는 대승(大乘)의 역정이었다. 그 역정은 그가 남긴 시에 오롯하다. 시에는 태산을 무너뜨릴 듯 웅혼한 선기(禪氣)와 자비심이 넘쳐 흐른다. 지난달 25일 사명당의 문집을 토대로 경남 밀양군 무안면 생가와 합천군 가야면 홍제암 등지로 그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비에 진 꽃 보고 깨닫다

	밀양 무안면 고라리 사명당 생가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사명당 비문 등에 따르면, 그의 고향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무안면 고라리다. 마을 입구에 그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가 '석 삼(三)' 자 형태로 나란히 들어서 있다. 생가는 암갈색 목조건물과 새하얀 창호지가 선명한 보색대비를 이뤄 자못 고졸한 운치를 자아낸다. 생가 건너편에는 그의 기념관과 넓은 저수지가 조성돼 있어 운치를 더한다.

'15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돌아오니(十五離家三十回·오십이가삼십회)/긴 내는 여전히 물이 서쪽으로 흐르는구나(長川依舊水西來·장천의구수서래)/감나무다리 동쪽 언덕 일천 가지 버들은(枾橋東岸千條柳·시교동안천조류)/태반이 내가 떠난 뒤에 심은 거라네(强半山僧去後栽·강반산승거후재)'. 사명당이 김천 직지사의 주지로 재임할 때 15년 만에 귀향해 쓴 시다.

사명당은 13세 무렵 김천에서 '맹자'를 읽다 번뇌 없는 학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 직지사로 가 신묵화상(信默和尙)의 강론을 들었다. 그리고 부모를 여읜 뒤 17세 되던 해에 정식으로 출가했다. 이듬해 승려 과거인 승과에 합격한 뒤 12년간 수도생활을 하다 직지사의 주지가 됐다. 사명당이 이 시를 쓴 지 400여 년이 흘러 산천이 많이 변한 탓에 지금 그의 고향에는 감나무다리와 버드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인근에 자리한 표충각. 옆으로 가지를 뻗은 향나무가 이채롭다.

생가에서 밀양 시내 쪽으로 2㎞가량 떨어진 곳에는 사명당을 기리는 표충비(表忠碑)가 세워져 있다. 높이 4m, 너비 1m 규모의 이 비석은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려 조짐을 알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1894년 11월 동학농민전쟁 발발 7일 전부터 2011년 11월까지 모두 30차례 땀을 흘렸다고 안내판에 소개돼 있다. 비석 앞에 심은 향나무가 인상적이다. 수령이 300년가량 된 이 나무는 위로 곧게 자라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우산을 펼친 듯 옆으로 가지를 뻗었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에서 사명당의 자비심이 느껴진다.

사명당은 32세 때인 1575년, 스스로 삶의 전기를 마련한다. 선종의 으뜸 사찰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지만 이를 고사하고 묘향산 보현사에 주석하던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서산대사의 설법을 듣고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 후 금강산 팔공산 지리산 태백산 등 전국의 명산들을 돌며 수행하던 사명당은 충북 음성 옥천산 상동암에서 소나기에 진 꽃을 보고 10년 만에 또 한 번 크게 깨닫는다.

	사명당

"너희는 제각기 신령스러운 성품을 갖추었는데도 어찌 그것을 구하여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부처는 내게 있는데 어째서 밖에서 구하려 치닫는가?" 사명당은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하며 해산시킨 뒤 10일간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든다. '만법은 본시 허공의 꽃이라(萬法由來空裏花·만법유래공이화)/어찌 헛되이 바닷속 모래를 셀 것인가(豈宜徒算海中沙·기의도산해중사)/단지 철벽 은산을 뚫어 나갈 뿐(但從鐵壁銀山透·단종철벽은산투)/어찌할까 어찌할까 묻지 말라(不問如何又若何·불문여하우약하)'. 선정 후 읊은 게송(偈頌)이다.

그즈음부터 사명당은 본격적인 보살행에 들어간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6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있었던 일화를 보자. 왜적이 절을 점령한 뒤 승려 20여 명을 묶어 놓고 금은보화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는 혼자 왜적을 찾아갔다. "금은보화는 온 나라 안에서도 희귀한데, 초의를 입고 채식하며 사는 중들이 어찌 금은보화를 쌓아두었겠느냐." 당당히 이치를 따져가며 말로써 적장을 제압했다.

■자신을 비워 중생을 보듬다

	홍제암 인근에 위치한 사명당 부도.

적장은 승려들을 풀어준 뒤 큰 판자에 '이 절에는 도승이 있으니 모든 군사는 들어오지 말라'고 써서 절문에 걸어 놓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사명당은 이어 왜적의 본대가 주둔하고 있던 강원도 고성으로 가서 적장을 상대로 백성을 죽이지 말라고 설득했다. 유점사에서 있었던 사명당의 담대한 행동을 전해 들은 적장은 이 훈계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영동 지방의 아홉 고을 백성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사명당은 마침내 불살생의 금기를 깨고 칼을 든다. 왜적의 총칼 아래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백성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든 활인검(活人劍)이었다. 서산대사의 명을 받들어 승병을 조직한 그는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1592) 등 문도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해 평양성 탈환, 수락산 승첩 등 연전연승을 거둔다.

사명당의 활약은 왜적과의 강화 교섭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은 두드러진다.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가토) "없다. 일본에 있다."(사명당) "무슨 소리인가?"(가토) "지금 우리나라는 그대 머리를 보배로 보고 있으니, 일본에 있는 셈이다."(사명당) 사명당의 한마디에 가토는 깜짝 놀라며 탄복한다. 이 이야기는 일본에 전해져 사명당의 명성을 높였다.

사명당의 보살행은 1604년 61세의 노구를 이끌고 일본에서 수행한 조선인 포로 송환 협상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열도를 제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했다.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조선 백성이 일본에 끌려와 부림을 당하는 것"이라며 송환을 거듭 요청했다.

	사명당 비문. 비문은 일제가 네 동강 내어 파손한 것을 붙여 복원했다.

'외로운 섬 아침 비 내리니(孤島崇朝雨·고도숭조우)/저문 가을 나그네 시름일세(窮秋滯遠愁·궁추체원수)/쑥처럼 우주를 떠도니(轉蓬流宇宙·전봉유우주)/슬프다 덧없는 인생이여(怊悵此生浮·초창차생부)'. 시에서 포로 송환 문제로 인한 시름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본에 머무르며 사력을 다한 끝에 사명당은 결국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할 수 있었다.

사명당은 말년을 해인사 홍제암(弘濟庵·보물 제1300호)에서 보냈다. 선조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하사한 절이다. 절에는 사명당과 스승 청허당, 동문 기허당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절 옆에는 사명당의 일생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높이가 3.15m에 달하는 이 비석은 두 번의 수난을 겪었다. 비문 작자인 교산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 교산의 이름을 쪼아 없앴고, 1943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해 네 동강을 내어 파손해버렸다. 1958년 부서진 비석을 다시 붙여 복원했는데, 현재 접합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절에서 북동쪽으로 20m가량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 잡은 사명당의 부도다. 높이 1.7m, 너비 1m 크기의 이 석종형 부도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은 탓인지 승려의 회색 납의처럼 수수해졌다. 크고 화려한 문양을 한 해인사 일대 다른 부도들과 대조적이다. 평생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온 사명당의 삶을 보는 듯하다.

"네 가지 요소(땅·물·불·바람)로 된 이 몸은 장차 참으로 돌아가려 한다. 어찌하여 시끄럽게 왕래하면서 이 허깨비 같은 몸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나 이제 입멸하여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 사명당은 67세이던 1610년 8월 26일 적멸에 들었다. 적멸은 무가 아니다. 자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는 자신을 비워 자연으로 돌아갔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