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기 '어우야담' 지은 유몽인
- 주요 관직 거친 뒤 남원부사로 부임
- 지리산 유람 후 기행문·한시 남겨

- 용유담 절경과 거친 물줄기 詩에 담아
- '유두류산록'에는 용 낚으려던 이야기
- 호방한 민초의 이야기꾼 숨결 오롯이

다소 썰렁한 감이 있지만, 수수께끼 하나 내어 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이야기꽃이다. 물론 밥을 공평하게 나눠 먹을 수 있는 세상이 가장 소망스럽다. 그러나 사람은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배부르면 듣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이야기다. 설령 배가 고프더라도 서로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정겨운 이야기로 고단한 나날을 버텨나간다. 인간은 '호모 스토리쿠스(Homo storicus·이야기하는 존재)'다.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용유교에서 바라본 상류 쪽 용유담. 깎아지른 협곡 사이로 흐르는 세찬 물줄기가 장관이다.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 환대 받는 건 당연지사. 소설가가 존경받는 이유다. 조선 중기에 아주 대단한 이야기꾼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담집인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지은 어우당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이 책에 실린 일부 이야기는 민초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근대소설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어우당은 이야기를 산문만이 아니라 시로도 풀어냈다. 지난 4일 그가 시로 쓴 야담의 현장을 찾아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용유담(龍遊潭)'으로 갔다.

■'이야기 사회학' 어우야담

	용유담 동쪽 산기슭에서 쏟아지는 폭포수.

용유담 소개에 앞서 어우야담과 어우당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어우야담은 번역본을 포함해 현전하는 이본이 30여 종에 이를 정도로 널리 읽혔다. 왜 그럴까? 이유는 재미다. 이 책에는 인륜·종교·학예·사회·만물 등 다섯 가지 기준 아래 모두 558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한 번 책을 손에 들면 쉽사리 놓지 못할 정도로 강한 흡인력이 있다.

등장인물도 왕후장상에서부터 역관·상인·천민·기녀·무당·귀신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 총망라돼 있어 '이야기 사회학'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마다 개성적인 인물들의 숨결이 생동한다. 이런 군상들의 생활상을 유교 윤리라는 당대의 지배적 가치로 재단하지 않고 상대주의적 시각 하에 있는 그대로 형상화했으니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쓴 국문학의 대가 김태준(金台俊·1905~ 1950)은 어우야담을 "설화문학의 백미"라고 평했다.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늙어서 대머리가 된 화가 김지(金禔)가 홍주를 지나다 그곳 수령의 주선으로 어린 기녀와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이튿날 세수하려다 자신의 머리가 창피하게 느껴진 그는 기녀에게 말했다. "들으니 네가 노승과 사통했다고 하던데, 대단히 상서스럽지 못한 일이다." 발끈한 기녀는 그 말을 전한 자가 무고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래도 김지가 한사코 "속이지 말라.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며 꾸짖자, 기녀는 화를 내다 못해 눈물까지 흘렸다. 그제야 김지가 세수하면서 말했다. "내 머리를 보아라. 내가 바로 그 노승이니라." 기녀는 몹시 기뻐하며 크게 웃었다.('대머리 김지의 해학')

'어우당'이란 호에서 유몽인의 자유분방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가치관이 여실히 드러난다. '과장해 속이거나 아첨한다'는 뜻이 담긴 이 호는 장자가 공자를 비판한 말에서 따왔다. "공자는 넓은 학문으로 자신을 성인에 빗대고, 허황된 말로 백성을 속이며, 홀로 슬픈 노래를 연주해 천하에 명성을 파는 사람이 아닌가?(子非夫博學以擬聖·자비부박학이의성 於于以蓋衆·어우이개중 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독현애가이매명성어천하자호)"라는 '장자'의 글귀가 그것이다.

어우당은 타계하기 전 5년 동안 어우야담을 썼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이듬해인 1590년(선조 23), 31세 때 벼슬길에 들어선 그는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 대제학 관찰사 암행어사 등 28년간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신으로 중국 명나라에 세 차례나 다녀오는 등 외교 분야에서 특히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의 의주 몽진을 호종한 데 이어 순안어사가 되어 당시 세자인 광해군을 보필하며 민생 안정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보고 겪었던 민생의 실상이 어우야담의 자료가 됐다.

마지막 사신 임무를 완수한 어우당은 52세 되던 해인 1611년(광해군 3) 2월 초, 고향 고흥과 가까운 남원에 부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3월 29일부터 4월 8일까지 승주 수령 유영순(柳永詢) 등과 지리산(두류산)을 유람한 뒤 기행문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과 기행시 '두류록'을 남겼다. 남원부 관아를 출발해 인월 환희령 갈월령 용유담 천왕봉 쌍계사 등 남원·함양·하동의 명승지를 거쳐 남원 관아로 되돌아간 게 그의 유람 일정이다. 유람 4일째인 4월 3일, 어우당 일행은 용유담에 이르렀다.

■민초의 영원한 이야기꾼

	송전마을 아래 너비 70여 m에 달하는 용유담.

용유담은 우리나라 3대 계곡의 하나인 칠선계곡을 비롯해 지리산의 온갖 물줄기들이 모이는 엄천강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좌우에는 수십~수백 m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이 첩첩 푸른 봉우리를 지탱하며 우뚝 솟아 깊고 거대한 협곡을 이루고 있다. 협곡 사이에 너비 70여 m에 달하는 물줄기가 흐른다. 동쪽 산기슭의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이 벼랑의 갈라진 틈으로 폭포수가 되어 떨어져 웅장한 느낌을 더한다.

기자가 현지에 간 날, 폭우가 내린 뒤 날씨가 개어가던 상태여서 용유담 일대에는 신비로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엄천강이 머리를 감춘 지리산의 아득한 준봉들에는 짙은 구름이 낀 데다, 불어난 강물이 시커먼 벼랑의 아랫도리를 깨부술 듯 세차게 흘러 용유담 일대의 풍경은 이름처럼 용이 놀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용유담에서 2㎞가량 떨어진 '세진대(洗塵臺)'에 올라 내려다보니 승천 형상이 더 확연했다. 400년 된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세진대 또한 이름대로 속진을 씻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세진대. 용유담 일대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어우당은 용유담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백 길 오래된 못은 밑도 없이 검푸르고(老湫百丈黝無底·노추백장유무저)/병풍 두른 푸른 협곡은 넝쿨로 덮여 있네(蒼峽擁屛蘿薛封·창협옹병라벽봉)/옥 움켜쥔 용바위에는 손톱자국 남았고(龍攫玉巖爪有跡·용확옥암조유적)/우레 같은 흰 물결 귓전을 때리네(雷轟雪浪耳渾聾·뇌굉설랑이혼농)/쑥 덮인 숫돌바위 여의주처럼 빛나고(葦蕭鍛石驪珠烱·위소단석여주경)/갈대와 물억새는 겹겹이 얽혀 있네(蘆荻縈絲絃素甲重·노적영현소갑중)/큰 갈고리로 백마 미끼 삼아 용 낚으려니(欲把大鉤餌白馬·욕파대구이백마)/온 산에 우박 날리고 강풍에 소나무 부러지네(滿山飛雹風摧松·만산비박풍최송)'.

'우뚝한 천 봉우리는 푸른 하늘 좇고(崒嵂千峰媚碧霄·졸률천봉미벽소)/서쪽 골짜기들 모두 와서 조회하네(西山衆壑揚來朝·서산중학양래조)/소 바치는 제사에 시골 무당춤 얼마나 보았나(刲牛幾見村巫舞·규우기견촌무무)/호랑이 가라앉혀 재앙 없앤다네(沉虎流傳災沴消·침호유전재려소)/옥항아리 새로 갈며 쏟아지는 물결(玉甕新磨奔浪戰·옥옹신마분랑전)/베 짠 듯 푸른 단풍 비취빛 그늘 드리웠네(靑楓如織翠陰稠·청풍여직취음조)/시 던져 신룡 분노 일으키니(投詩誤觸神龍怒·투시오촉신룡노)/벼락치고 비우박 쏟아지네(霹靂轟天雨雹交·벽력굉천우박교)'.('용유담' 2수)

어우당의 호방하고 활달한 성품이 시에 오롯하다. 이 시를 이해하려면 용유담에 얽힌 전설을 알아야 한다. 용유담에 눈먼 용 한 마리를 포함해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인근 마적암에는 마적도사가 당나귀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도사는 식량이 떨어지면 구입할 품목을 적은 쪽지를 당나귀에게 주고 장에 가서 사오게 했다. 당나귀가 식량을 싣고 용유담에 와서 울면 도사가 쇠지팡이로 다리를 놓아 건너게 했다. 그런데 한 날은 도사가 천왕 할매와 장기를 두는데 정신을 판 데다 눈이 성한 용 여덟 마리가 서로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요란하게 싸우는 바람에 당나귀가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울다 지친 당나귀가 물에 빠져 죽자 화가 난 도사가 눈먼 용만 남겨 놓고 나머지 용들을 모두 내쫓아 버렸다.

유두류산록에 따르면 어우당은 용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한다며 절구 한 수를 써서 용유담에 던졌다. 천금의 가산을 탕진해 용 잡는 기술을 터득했다는 장자의 주평만(朱泙漫)처럼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으려는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그러자 "절벽의 동굴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우레와 벼락이 치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지고 소나기가 퍼붓는" 게 아닌가. 일행은 혼비백산해 "곧장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어우당은 이처럼 이야기를 달고 사는, '걸어 다니는 이야기 책'이었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재미난 이야기를 생산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은 그였지만 말년은 불행했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해 당시 집권세력인 대북(大北)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그리고 5년 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모의에 가담했다는 무고로 처형됐다. 신원은 170여 년 후에 이뤄졌다. 정조가 그의 문장과 절개를 높이 사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하지만 이는 집권 여부로 사람의 가치가 판가름 나는 정치적 판단일 뿐이다. 이보다 더 소중한 건 민초의 인간적 평가다. 민초는 그가 지은 이야기에 웃고 울며 삶을 추슬러 왔고 앞으로도 그럴 터이다. 그런 민초의 가슴 속에 그는 언제나 '호쾌한 어우당'으로 살아 있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