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인과 승려 경계의 삶 살았던
- 조선시대 천재 문인 김시습
- 용장사에 오두막 짓고 6년 살며
- 우리나라 첫 소설 '금오신화' 써

- 3층석탑, 석조여래좌상, 미륵불…
- 곳곳에 숨은 천 년 신라의 숨결
- 불의에 맞선 문학창작 원동력 돼

시대와의 불화는 삶을 경계로 몰고 갔다. 유학의 세례를 받았지만 도학의 포부를 펼 수 없었고, 불교의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세속과의 인연을 끊을 수도 없었다. 속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닌 경계에 선 사람.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정권과 등지고 산으로 떠난 조선 전기의 천재 문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다.

하지만 경계는 꽃을 피웠다. 그 꽃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다. 신라 천 년의 혼이 서린 경주 남산('금오'는 다른 이름)이 소설의 산실이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기암괴석, 능선 곳곳에 널린 불상과 불탑, 온 산에 서리서리 깃든 판타지. 남산은 매월당이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에 더없이 좋은 상상력의 보고였다. 지난달 27일 그의 주옥같은 시들을 이정표 삼아 남산을 찾았다.

	용장사터에서 내려다본 경주 들판

■비승비속의 경계인 매월당

매월당의 삶부터 간추려 보자.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쓴 '김시습전'에 따르면, 그는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혼자서 글을 깨쳤다. 또 세 살에 시를 지을 줄 알았는데, 그 수준이 비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레 소리도 없는데 어디서 흔들리는지(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하처동)/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에 흩날리네(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매월당의 유모가 보리방아를 찧는 것을 보고 그가 읊은 시다.

매월당의 천재성이 알려지자, 당시 임금인 세종이 승정원에 분부를 내려 실력을 시험하게 했다. '어린 아이의 학문이(童子之學·동자지학)/흰 학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白鶴舞靑松之末·백학무청송지말)'. 승정원 관리가 그에게 시구를 부르며 대구를 맞추게 했다.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聖主之德·성주지덕)/누런 용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번득이는 것 같아라(黃龍翻碧海之中·황룡번벽해지중)'. 이에 매월당은 즉석에서 모든 시어와 색깔까지 완벽히 대구를 이룬 시구로 화답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용장사 3층석탑. 자연석에 탑을 쌓아 산 전체를 받침대로 활용한 듯한 인상을 준다.

세종은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다. 그 집안에 권하여 잘 감추고 가르치게 하면, 그의 학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며 매월당에게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임금의 칭찬과 기약을 받은 그는 더욱 학업에 열중했다. 그러나 시운은 그의 순탄한 미래를 허용하지 않았다. 세종과 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어린 단종을 숙부인 세조가 죽이고 보위를 빼앗은 것이다.

삼각산에서 공부하던 매월당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흘간 통곡하더니 책을 모두 불사른 뒤 설악산에 들어가 불가에 귀의했다. 법명은 설잠(雪岑), '눈 덮인 봉우리'라는 뜻이다. '머리를 깎은 건 속세를 도피함이요(削髮逃塵世·삭발도진세)/수염을 남긴 건 대장부를 나타냄일세(有鬚表丈夫·유수표장부)'. 그가 머리를 깎으면서 남긴 시다. 매월당은 그 이후 관서 관동 호서 호남 등지를 유람했다. 이 시기 그는 민생을 두루 접하고 겪으면서 소설 창작의 자료를 축적한 듯하다.

	용장사 석조여래좌상.

그러다 31세 때인 1465년 그는 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오두막을 짓고 6년 남짓 살며 금오신화를 집필했다. 금오신화의 창작공간을 살펴보자. 현재 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절터는 남산의 중심지인 고위봉(494m)과 금오봉(468m) 사이 용장계곡의 가장 높은 지대에 층을 이뤄 조성돼 있다. 두 봉우리와 눈높이를 나란히 할 정도다. 절터에 서면 남산 전역은 물론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산의 정기가 절터를 축으로 흐르는 것 같다.

그래서 절터는 매월당이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기에 최상의 환경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절터에는 삼층석탑(보물 제186호)과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이 천 년 풍상을 이겨내고 의연히 서 있다. 모두 돌을 떡 주무르듯 다루는 신라인들의 빼어난 솜씨와 미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용장사 마애여래좌상.

높이 4.42m의 삼층석탑은 자연석 위에 쌓아 올려 산 전체가 받침돌인 듯 강건하고 웅혼한 느낌을 준다. 그 아래층 평지의 중앙에 자리한 석조여래좌상(높이 4.56m)은 머리가 없어져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미륵장륙상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유가종의 조사 고승 대현(大賢)은 남산 용장사에 살았다. 그 절에는 돌로 만든 미륵보살 장륙상이 있었다. 대현이 항상 이 불상을 돌았는데, 불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불상의 생김새가 독특하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원형 좌대를 탑처럼 3층으로 쌓은 뒤 그 위에 불상을 안치했다. 정교하고 부드러운 불상의 층단식 옷 주름은 신라 조형미술의 원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불상 뒤편 수직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듣겠다는 듯 눈에서 목까지 늘어진 길고 큰 귀를 지녔다. 매월당은 대현처럼 석조여래좌상을 돌고 마애여래좌상을 바라보면서 권력 장악을 위해서라면 인륜을 서슴없이 저버리는 불의한 세상이 아닌 정의가 연꽃처럼 피어나는 정토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경계에서 핀 꽃 '금오신화'

	통일전 하산길 바위 벽에 새겨진 좌불.

'머리 풀고 미친 듯 노래하다 피 토하며 쓰러지니(散髮狂歌嘔血臥·산발광가구혈와)/현릉 둘레 소나무 측백나무가 꿈속에도 가득하구나(顯陵松栢夢森森·현릉송백몽삼삼)'. 그가 금오봉에 올라 쓴 시구에는 이런 심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현릉은 문종과 그 왕후의 묘소다. 매월당은 울분을 가라앉히고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세계를 소설 속에 그려냈다. 글을 쓰는 그의 마음은 평온했다.

'오두막에 모포를 까니 두루 따뜻한데(矮屋靑氈暖有餘·왜옥청모난유여)/매화 그림자 가득한 창에 달이 막 밝았구나(滿窓梅影月明初)/등불 돋워 밤 늦도록 향을 사르고 앉아(挑燈永夜焚香坐·도등영야분향좌)/사람들 못 본 글 한가로이 짓네(閑著人間不見書·한저인간불견서)'. 매월당이 금오신화를 지으며 쓴 시다. '매월당'이란 호는 이 시의 둘째 구에서 따왔다.

금오신화는 어떤 소설일까?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다섯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는 중국 문학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정신이 가득하다. 우리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우리 땅과 역사가 시·공간적 배경으로 설정돼 있다. 그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힌 소설은 송나라 때 편집된 '태평광기'나 명나라 초 작품인 '전등신화' 등 중국 일색이었다.

	삼화령 미륵불 좌대.

남원의 노총각 양서생이 매월당의 생존 당시 실재했던 만복사에서 왜구에게 목숨을 잃은 처녀를 만나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랑을 나누는 '만복사저포기'가 그렇고, 송도의 부유한 상인 홍서생이 평양 부벽정에서 기자(箕子)의 후손인 선녀와 사귀다 선계로 가게 되는 '취유부벽정기' 또한 그러하다. 경주의 유학자 박서생이 염라왕에게서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늠름한 기백을 인정받아 염라왕의 후계자가 되는 '남염부주지'에는 세조 정권의 불의를 심판하려는 굳센 의지가 스며 있다.

'풀잎 우거진 산골짜기 깊어(茸長山洞窈·용장산동요)/사람 오는 것을 볼 수 없네(不見有人來·불견유인래)/시냇가의 대나무는 가랑비에 자라고(細雨移溪竹·세우이계죽)/비껴가는 바람은 들판의 매화를 지켜주네(斜風護野梅·사풍호야매)/작은 창가에서 사슴과 함께 잠자고(小窓眠共鹿·소창면공록)/마른 의자에 앉으니 이 내 몸이 재와 같구나(枯椅坐同灰·고기좌동회)/초가집 처마 아래서 깨닫지 못했네(不覺茅詹畔·불각모첨반)/뜨락의 꽃 지고 또 피어나는 것을(庭花落又開·정화낙우개)'.

'용장사에 머물면서'란 시다. 우리만의 기이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 그곳에서 지낸 나날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매월당은 남산을 고향으로 여겼고, 그곳을 떠난 뒤에도 내내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그는 전국을 방랑하다 59세 되던 해 충청도 홍산현(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매월당에 대한 추억은 미륵불과 겹쳐진다. 금오봉·고위봉과 삼각형을 이루는 봉우리인 삼화령(三花嶺)에서 미륵불에 투영된 매월당을 떠올렸다. 남산 남쪽 골짜기에 묻혀 있던 미륵불을 파내어 모셨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지금 미륵불은 없고 지름 2m가량의 좌대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부재는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맞이하기 위한 비움이다. 그리고 그 비움은 제2, 제3의 금오신화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