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상주·구미 맞닿은 낙동나루
- 예로부터 교통·물류의 중심
- 1970년대까지 나룻배 왕래 잦아

- 조선의 학자 김종직과 제자 김일손
- 우국·풍류 노래한 주옥같은 한시
- 기암절벽 위 관수루 현액으로 남아

초대장은 이미 배달돼 있다. 아직 보지 않았거나 보고도 던져놓은 채 잊고 있었을 뿐이다. 댓잎에 서걱대는 서늘한 바람, 속진을 씻어내리는 청량한 계류, 굽이굽이 마을을 감싸 안고 이어지는 산과 강…. 초대장에는 오래전 우리 산천을 노닐고 그 속에 깃든 인간사의 정한을 곡진하게 풀어낸 시가 갈무리돼 있다. 선인들의 한시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 낙동강변 둔치에서 바라본 의성군 단밀면 관수루. 깎아지른 벼랑 위의 울창한 솔숲 속에 들어선 누각이 절경이다.

모든 글이 그렇듯, 시 또한 쓰는 순간 시인을 벗어나 독자를 향한다. 수백 년 전 시인의 노래가 오늘날 독자에게 '자연과 인생의 초대장'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열섬의 도시에 염증을 더해가는 여름, 선인들의 시심이 흐르는 산천과 마을로 '한시 기행'을 떠나 보자. 찌든 일상에 파묻혀 시들어 버린 우리의 빛나는 감성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강물에 풀어낸 민초의 고통

	김종직

첫 번째 한시 기행지로 고른 곳은 경북 의성군 단밀면과 상주시 낙동면, 구미시 옥성면을 끼고 있는 낙동나루다. 지난 23일 그곳을 찾았다.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해 400리를 흘러내려 온 낙동강은 이곳에 이르러 마주 보이는 강기슭이 아스라할 정도로 물굽이가 넓어진다. 그 넉넉한 자태는 낙동강이 바다와 몸을 섞는 하구에 못지않다.

낙동나루는 예로부터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다. 배로 실어온 낙동강 하류의 물자를 여기서 수레에 옮겨싣고 문경새재를 넘어 중부 내륙으로 운송했다. 서울로 왕래하는 영남 지방 사람들 역시 반드시 거쳐가는 길목이었다. 그런 만큼 낙동나루는 1300리 낙동강 물길 가운데 규모가 제일 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나룻배의 왕래가 빈번했으나 1986년 길이 434m짜리 낙단교가 놓이면서 나루의 기능을 잃었다. 한창때의 낙동나루 모습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이자 학자, 사림파의 태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쓴 '낙동요(洛東謠)'다.

'황지의 원천은 겨우 잔에 넘칠 정도인데(黃池之源纔濫觴·황지지원재남상)/여기까지 흘러와선 어찌 이리 넓어졌나(奔流倒此何湯湯·분류도차하탕탕)/한 물이 예순 고을 한가운데를 가르니(一水中分六十州·일수중분육십주)/나루마다 돛대가 줄을 이었네(津渡幾處聯帆檣·진도기처연범장)/바다까지 내리 사백리(海門直下四百里·해문직하사백리)/바람 따라 오가는 장사꾼들(便風分送往來商·편풍분송왕래상)/아침에 월파정을 떠나면(朝發月波亭·조발월파정)/저녁에 관수루에서 묵네(暮宿觀水樓·모숙관수루)/누각 아래 나루에 천만 꿰미 돈 실은 배 매였으니(樓下綱船千萬緡·누하강선천만민)/남쪽 백성들 가렴주구 어이 견디랴(南民何以堪誅求·남민하이감주구)/쌀독은 비고 도토리마저 떨어졌는데(缾甖已罄橡栗空·병앵이경상률공)/강가에선 풍악 울리며 살진 소를 잡네(江干歌吹椎肥牛·강간가취추비우)/조정의 사자는 유성같이 지나치니(皇華使者如流星·황화사자여유성)/길가 해골에게야 누가 이름이나 묻겠는가(道傍觸髏誰問名·도방촉루수문명)'.

	관수루에서 바라본 낙동강.

1476~79년 점필재가 노모 봉양을 위해 낙동나루와 가까운 선산부사로 재임할 때 쓴 시다. 선산은 점필재 부친의 고향이다. 둘째 구의 '여기'는 낙동나루, 일곱째 구의 '월파정'은 선산군 도개면에 있던 정자, 여덟째 구의 '관수루'는 낙동나루 위에 있는 누각이다. 관수루는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낙동강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고려 중엽에 세워진 이 누각은 1874년 물난리로 유실됐으나 1990년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복원했다. 물길이 넓으면 주변의 산수 역시 웅장하고 수려한 법. 낙동나루와 관수루 일대의 풍광은 실로 빼어나다. 수십 m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이 수백 m나 병풍처럼 펼쳐졌고, 그 위에 날아갈 듯 우아한 지붕을 인 관수루가 자리 잡아 낙동강의 유장한 흐름을 굽어보고 있다.

	관수루 측면.

관수루에 오르면 강은 물론 의성·상주·구미 세 고을의 주름진 산과 드넓은 들판까지 한눈에 들어와 막힌 가슴이 펑 뚫린 듯 시원해진다.

하지만 점필재의 눈에는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들어오지 않았다. 천만 꿰미의 가혹한 징세 때문에 굶주리다 죽어가는 백성들의 참상과 이를 외면한 채 제 뱃속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관리들의 타락상이 대비적으로 포착됐을 따름이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목민관이라면 민생이 도탄에 빠졌는데 어떻게 음풍농월할 수 있겠는가. 이 시에는 비뚤어진 당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이 담백하게 드러나 목민에 임하는 그의 진지한 자세를 짐작하게 한다.

■새로움 향한 부단한 흐름

	관수루 안에 걸린 김종직의 한시 '낙동요' 현액.

점필재에게 낙동나루 일대의 강은 이처럼 백성의 고통을 직시하고 경세관을 가다듬는 곳인 동시에 심신 수양의 단련장이기도 했다. 그는 이에 관한 시도 썼다. '흰 새는 배를 맞이하고(白鳥如迎棹·백조여영도)/푸른 산은 너그러이 객을 보내네(靑山慣送賓·청산관송빈)/맑은 강에는 한 점 꿰맨 자국도 없으니(澄江無點綴·징강무점철)/내 몸의 거울로 삼으려네(持以律吾身·지이율오신)'.('낙동나루'의 일부)

문장에서 "당대의 독보"라는 극찬을 받은 점필재는 시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은 "점필재의 시를 최고라고 하는 것은 실로 지나친 칭찬이 아니다"면서 "정교·세밀하고, 상쾌·명랑하며, 호방·원대하다"고 했다. 신흠보다 한 세대 늦은 시대를 살았던 문장가이자 비평가 남용익(南龍翼·1628∼1692)도 "점필재의 시는 굳세고 호걸스럽다"고 했다.

점필재의 두 시는 현액으로 만들어져 현재 관수루에 걸려 있다. 낙동나루 일대의 강은 그만이 아니라 다른 학자와 문인들에게도 사물과 인생의 이치를 일깨우는 정신적 교사가 됐다.

	관수루 앞에서 본 낙단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특히 '관수'라는 누각 이름에 주목했다. 그는 "강물을 보면 묘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가는 것은 물과 같다. 밤낮을 그치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서자여사부 불사주야)"는 공자의 말씀이나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상선약수)"는 노자의 잠언과 같은 맥락이다. 장자는 "강물을 보면 마음이 깨끗해진다(觀水洗心·관수세심)"고도 했다.

점필재의 제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도 낙동나루와 관수루에 들러 강을 소재로 한 시를 남겼다. '해질녘 백사장에 머문 한 척의 조각배/분분히 오가는 말과 소가 끄는 행렬/만고의 세월 동안 강산은 변함없는데/인간은 한평생 늙다가 스스로 그치네/서산 노을 이미 아득한 물결에 잠기고/낙동강은 그침 없이 유유히 흘러가네/배 멈추고 황혼에 우두커니 홀로 서니/수면을 스치고 날아가는 한 쌍의 갈매기'.

시에는 언제나 의연한 산, 다함 없이 흘러가는 강과 같은 마음으로 혼탁한 세상을 꿋꿋이 헤쳐가려는 굳은 의지가 스며 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겠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는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시구에서 호를 따온 데서도 올곧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시의 현액은 스승의 시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는 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스승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적어 넣었다. 조의제문은 초나라 의제를 죽인 항우를 비난한 글인데,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빗댄 것으로 해석할 소지가 있었다. 결국, 유자광과 이극돈 등 훈구파가 탁영을 비롯한 사림파를 몰아내는 빌미가 됐다. 1498년(연산군 4)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점필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탁영은 극형에 처해졌다.

점필재와 탁영의 시, 공자와 노자와 장자의 말씀을 떠올리며 오래 강을 바라봤다. 강은 잔물결에 부서지는 하오의 햇살에 회신을 실어 보내는 듯했다. "성현들의 말씀과 선비들의 시가 수백, 수천 년 역사의 강을 흘러 네게 닿았듯이 나 또한 묵묵히 흐를 뿐이며, 그 흐름을 좇아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게 세상 사는 바른 이치"라고.

글·사진=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