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과 들을 어루만지듯 흐르는 내성천
- 흰 백사장에 앉은 '육지 속 섬' 회룡포
- 폭우로 강물이 넘치면 섬으로 변해

- 비룡산 정상 아래 천년고찰 장안사
- '동명왕편' 이규보, 머물며 불교에 심취

- 낙동강·내성천·금천 세 강이 몸 섞고
- 주흘산·학가산·팔공산이 만난 삼강나루
- 주모도 나룻배도 만남도 사라진 주막
- 450년된 회화나무와 들돌만 덩그러니

강은 산에 기대고, 산은 강을 받쳐 준다. 산과 강은 그렇게 한몸이 되어 굽이굽이 휘돌아 가며 물길을 낸다. 그 물길은 용틀임하듯 유장하고, 비단 펼친 듯 아름답다. 낙동강 유역 최고의 비경, 경북 예천 회룡포와 상주 경천대에서 본 곡선의 미학이다. 두 곳에는 그런 산수를 닮은 사람들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도 풍성하다. 지난 10일 산수와 사람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미담을 찾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경북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와 지보면 마산리에 걸쳐 있는 회룡포. 내성천이 350도로 휘돌아 흐르면서 형성된 '육지 속 섬'이다.

■회룡포, 곡선의 미학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와 지보면 마산리에 걸쳐 있는 회룡포(回龍浦)부터 들렀다.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비룡산(飛龍山·240m)을 태극 무늬 모양으로 굽이치며 만든 16만여 ㎡ 크기의 타원형 '육지 속 섬'이다. 실제 섬은 아니지만 육지와 이어진 길목이 좁고 낮아 폭우로 강물이 넘치면 섬으로 변한다고 한다. 평지에선 보이지 않지만, 비룡산 정상에 서면 포구와 산의 이름처럼 용이 꿈틀대며 날아오르는 듯한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감록'에서 '십승지지(十勝之地·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곳)'의 하나로 꼽은 명승이다.

회룡포 여행의 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회룡·비룡의 장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문학사상 최초의 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쓴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문학적 자취를 확인하는 거다. 회룡포에서 내성천을 건너 이런 묘미를 간직한 비룡산으로 향했다. 최근 강수량이 적었던 탓인지 내성천은 곳곳에 크고 작은 모래톱을 드러낸 채 실개천처럼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모래는 분가루를 뿌려놓은 듯 희고 고왔으며, 강물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았다.

	비룡교에서 바라본 삼강 합류 지역.

비룡산 산행은 시 읽기로 시작했다. '비룡 닮은 산 감싼 짙은 구름/서로 어울려 남쪽 하늘에 머물더니/음덕 가득 실은 비 되어 내리네/우리 고을 천년만년 풍년 누리리라'. 조선 말기 학자 김영락(金英洛·1831~1906)의 시 '용주팔경(龍州八景)' 여덟 수 중 다섯 번째 시다. 여덟 수 전부를 새긴 시비가 등산로 초입에 세워져 있다. 시구마다 고향의 아름다운 산수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충만하다. 용주는 용궁면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용주팔경 시비는 이규보의 문학세계로 들어가는 디딤돌이다. 시비에서 1.3㎞가량 떨어진 비룡산 정상 아래 자리한 천년고찰 장안사(長安寺)에 이규보 문학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 절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며 부산 기장과 금강산을 포함한 전국 세 곳에 세웠던 장안사 중 하나다. 이규보는 29세 되던 1196년 개성의 집을 떠나 예천과 상주 일대를 떠돌 때 이곳에 머물며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회룡포와 회룡마을 사이 내성천 위에 가설된 다리.

당시 문신을 핍박하던 무신정권 치하이다 보니 그는 과거에 장원급제하고서도 7년째 관직에 나가지 못해 굶주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26세 때 '동명왕편'을 지으면서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등 민족의식에 눈을 떴던 터라 현실에 대한 불만이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절에도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당당히 표출한다.

'푸른 산속 굽이굽이 백 번 돌아/한가로이 낙동강을 지나가누나/풀이 깊어도 길은 있나니/소나무 고요해 바람도 없다/가을 물은 청둥오리 머리처럼 푸르고/새벽 노을은 성성이 피처럼 붉다/누가 알리 이 나그네가/천하의 시인인 줄을'.('낙동강을 지나며') '길을 가다 멈춰 서서'란 제목의 시에서는 낙동강의 산수처럼 넉넉한 인생관도 피력한다. '험한 땅이 나오면 멈추면 되고/강물을 만나면 배를 띄우지/여기에 머문들 무어 나쁘며/저기로 간들 무얼 바랄꼬/커다란 천지 가운데/내 인생 즐겁고 한가롭다네'.

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장안사에서 회룡포 전망대가 있는 비룡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김광섭(金珖燮·1905∼1977) 시인이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줬다.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흐르는 냇물에 흘러서/자국은 있는데/타는 노을에 가고 없다'. 자연과 하나되려는 의지가 담긴 이 시구를 등산로변 나무에 걸린 시화 목판에서 발견했다.

회룡포의 명성은 과연 헛되이 퍼진 게 아니었다. 산과 들을 어루만지듯 적시며 흐르는 내성천, 강물이 들어온 만큼 물러서서 흐름을 응원하는 산과 들, 널따란 백사장 위에 살포시 앉은 마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회룡포는 하늘이 지은 옷처럼 한 땀 꿰맨 데 없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조화는 지구의 공전 같은 안정된 타원으로 나타났다.

■삼강, 사라지는 풍경

	비룡산 등산로 초입에 세워진 용주팔경 시비.

산수의 만남은 회룡포에서 3㎞가량 떨어진 풍양면 삼강리에서 확대된다. 삼강은 안동에서 흘러오는 낙동강과 봉화군 선달·옥석산에서 발원하는 내성천, 충북 죽원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이 한데 몸을 섞는 곳을 말한다. 더불어 강을 따라 뻗어온 문경 주흘산과 안동 학가산, 대구 팔공산 자락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삼강(三江)·삼산(三山)'이라고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낙동강 하류에서 배로 실어온 각종 화물과 공물이 수레나 소와 말에 옮겨져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운송됐던 수륙교통의 요충지였다. 삼강나루는 그렇게 형성됐다. 나루 주변은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부려놓는 농산물의 집산지였고, 대구와 서울을 잇는 군사도로도 건설돼 있어 1960년대까지 몰려드는 유동인구로 늘 북적였다.

그 때문에 나루에는 자연스레 주막들이 들어섰다. 30대에 남편을 여읜 뒤 홀로 갖은 고생을 하며 다섯 남매를 키웠던 유옥연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주막을 운영했다. 할머니는 장꾼이나 길손들이 "뱃가 할매요, 내 왔소!" 하고 부르며 주막 평상에 앉으면 얼른 술과 밥을 내오고, 기분 좋은 날은 걸쭉한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90세 되던 2005년 노환으로 별세한 뒤 주막은 비어 있다. 할머니가 가고 없는 주막을 지금은 수령 450년 된 회화나무 한 그루와 일꾼의 품삯을 결정하는 시험도구로 사용된 들돌 3개가 지키고 있다.

	삼강나루 뒤편에 있는 삼강주막.

"여 주막이 한창일 때는 육십년대였제. 그때는 낙동강에 배가 연락부지래(연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여 삼강나루도 큰 배 작은 배 해서 두 척이나 있었지. 통선이라꼬 작은 배는 주로 사람 실어 나르고, 큰 배는 짐을 싣고도 소가 다섯, 여섯 마리씩 들어갔어.…늦은 봄에 배가 소금을 오본이(가득) 싣고 안동까지 가거든. 봄디면 장담기를 하니까 주로 소금배가 오는 거지. 소금배가 내려갈 때는 주로 나락 팔아서 갔제. 소금하고 나락 바꾼 거야." 할머니가 생전에 한 기업체 사보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회고담이다. 할머니는 삼강나루에서 벌어진 사람과 물건의 교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최후의 증언자였다.

	삼강주막 뒤뜰에 놓인 들돌.

"제방 생긴 뒤로 큰물 진다고 캐도 걱정은 안돼 좋다만, 난 제방 해 놓으니 더 파이라(안 좋아). 제방 없을 적에는 주막 마루에 앉아 강을 보면 세 강과 세 산이 합쳐지는 기 훤히 내다보이고 해서 참 볼 만했어. 시방 제방이 앞을 떡 막아섰으니 어띠구로(어찌나) 답답한지. 우로는 안동댐 생끼뿌니까 강물이 많이 안 내려오제 하니 홍수 걱정은 이자뿟다만(잊어버렸다만), 근데 강바닥 꼬라지는 안되여. 제방되고부텀 풀피리가 막 들아서고 해서 볼끼 없어."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개발 소용돌이에 묻혀 사라진 풍경을 몹시 아쉬워했다.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히 풍경뿐일까? 강과 산의 만남, 산수와 사람의 만남,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까지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할머니를 대신해 묻는다. 할머니의 아쉬움이 동반하는 의문이어서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