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 곡창지대에서 난 쌀, 일본 반출 시설인
- 항구-시내 연결한 '해망굴'·뜬다리 '부잔교'
- 개항이후 일제 식민지 수탈 흔적 고스란히

- 옛 군산세관·나가사키 18은행·조선은행…
- 아픔 간직한 건축물, 현재는 미술관 등 활용

- 채만식 소설 '탁류' 속 궁핍했던 조선인과 달리
- 부귀 뽐내는 '히로쓰 주택' 등 170여 채 산재
- 일제가 지은 사찰 '동국사'엔 조동종 사죄문도

시간이 해방 무렵 멈춰선 것일까. 세관 은행 상사 등 군산항 부둣가에 늘어선 서구풍의 근대 건물들은 일제 말기에서 바로 건너온 듯 강한 이국적 정취를 풍긴다. 원도심 곳곳에는 변화의 바람에서 비켜난 일본식 주택들이 들어앉아 있다. 물이 빠져나간 항구의 시커먼 개펄에 얹혀 덩그러니 밑바닥을 드러낸 어선들에선 세월이 녹슬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지난 3일 찾은 전북 군산 근대문화역사거리와 원도심의 풍경이다. 군산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그래서일까. 군산의 골목길을 걸으면 빛바랜 근대의 기억들이 일상으로 하나둘 호출되어 나온다. 때론 아픔을 어루만지고, 더러는 부끄러움을 되새기며 기억은 과거를 벗어나 미래로 조금씩 나아간다. 그 골목으로 가 보자.

군산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해망굴

■수탈 가속화한 식민지 근대화

군산의 근대는 1899년 개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50여 가구, 500여 명이 사는 한적한 어촌이었던 군산은 개항과 함께 지금의 장미동을 비롯한 원도심에 일본 프랑스 등 57만2000㎡의 각국 공동조계지가 설정되면서 근대도시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항만과 도로, 철도가 건설되고 근대 건물들이 잇따라 들어선다. 하지만 이는 우리에 대한 일제의 침략과 수탈을 가속화하는 식민지 근대화였다.

부둣가에 자리한 옛 군산세관, 옛 나가사키 18은행(현 군산근대미술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군산근대건축관) 등에서 그 자취를 여실히 목격할 수 있다. 옛 군산세관은 제1차 군산항 건설공사기간(1905~1910년) 중인 1908년(대한제국 순종 2)에 지어졌다. 화강암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회색 지붕과 아치형 창문을 설치한 서양식 단층 건물이다. 세관은 한국은행 본점, 서울역사와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3대 서양 고전주의 건축물이다.

옛 군산세관

세관 건립은 관세 수입을 올려 궁핍한 대한제국 재정에 숨통을 틔우려는 목적에서 한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일제에 좋은 일만 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일제가 세관 건립을 핑계로 프랑스인을 앞세워 대한제국으로부터 8만6000원을 받아낸 뒤 부두 등 자국에 필요한 항만시설까지 건설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항만에 이어 그해 호남평야의 중심지인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국 최초의 포장도로와 1912년 군산~익산 철도를 개통했다. 자국에 부족한 쌀을 우리에게서 효율적으로 빼앗을 수 있는 사회간접자본을 착착 구축해나간 것이다. 이를 통해 일제는 연간 200만여 석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옛 나가사키 18은행

옛 나가사키 18은행은 일본으로 쌀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해 1907년 군산에 설립됐다. 이 은행의 주요 업무는 일본인들에게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대출금으로 우리 농부들에게 토지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을 했다. 돈을 갚지 못하는 한국인 농부의 토지는 일본인에게 속속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1910년 24곳이었던 전북 지역 일본인 농장은 1920년 58곳, 1925년에는 87곳으로 늘어났다. 이 중 1000정보(1정보는 9917㎡) 이상이 9곳, 100정보 이상은 39곳에 달했다.

나가사키 은행 앞에는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가 쌀을 보관하던 창고도 있다. 현재 다목적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장미공연장'이다. 일제의 쌀 수탈 거점항이었던 군산에는 이런 창고가 많았다. '장미(藏米)'라는 동네 이름도 이 때문에 붙여졌다. 1922년 세운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역시 일본인에게 특혜를 주고 조선인을 착취했던 금융기관이었다. 붉은 벽돌의 2층 외벽에 아래위층을 수직으로 잇는 6개의 길쭉한 창문을 설치한 이 건물은 당시 경성 이외 지역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 꼽혔다.

일제는 쌀을 더 많이 빼앗기 위해 투기에도 손을 뻗쳤다. '미두장(米豆場)'이 그것이다. 미두장은 미래 일정한 시점에 쌀을 사고파는 권리를 거래하는 곳으로, 이 과정에서 시세차익을 놓고 노름이 벌어져 재산을 탕진하는 한국인이 속출했다. 미두장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맞은편에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한국선박중개소 군산지점이 들어서 있다.

■일본 불교 조동종 과거 잘못 사죄

원도심 도로와 부두에도 수탈의 흔적은 뚜렷하다. 1926년 물자를 신속하게 나르기 위해 군산항과 시내를 연결한 길이 130m의 반원형 터널 '해망굴'이 그 하나다. 이 터널은 6·25전쟁 때 군산에 진주한 인민군이 지휘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일제는 1926~1938년 4기의 부잔교(뜬다리)도 설치했다. 서해의 조수간만 차가 커서 접안시설을 설치하기 어렵자 부두와 배를 잇는 다리를 놓은 것이다. 부잔교를 통해 하루 화차 150량 분량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부잔교는 현재 3기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는 일본인을 영주로, 한국인을 소작인이나 도시 빈민으로 만들었다. 1924년 말 전북 농민의 3분의 2가 넘는 13만7000여 명이 소작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군산의 한국인 대다수가 산비탈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남자는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고, 여자는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거나 정미소에서 쌀을 가려내는 미선공으로 일했다. 당시 군산의 미선공이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언덕 비탈에 의지하여 오막살이들이 생선 비늘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중에서도 산상 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데 명님이네가 도통 오 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 가지고 건넌방은 따로 먹곰보네한테 이 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 군산 출신의 소설가 채만식(1902~1950)은 자신의 대표작 '탁류'에서 당시 군산에 사는 한국인들의 가난한 생활상을 이같이 묘사했다.

히로쓰 주택

반면 원도심에는 일본인들이 남긴 부의 자취가 즐비하다. 신흥동 일본식 주택이 대표적인 사례다. 포목점을 운영했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이 집은 'ㄱ'자 모양으로 붙은 2층 건물 두 채 사이에 석등과 분재, 바닥돌 등 자연을 축소해 놓은 듯한 일본식 정원이 어우러져 독특한 아취를 자아낸다. 현재 170여 채의 일본식 주택이 원도심에 남아 있다.

군산 근대골목 기행은 금광동 동국사에 이르러 질적 전환을 맞는다. 일제 식민지 수난사를 털고 일어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일제가 한국인들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 자국의 불교 대표 종파인 조동종을 동원해 세운 사찰인데, 조동종은 일본 정부와 달리 1992년 우리에게 진심으로 사죄한 뒤 용서를 구했다.

군산항 부두와 배를 잇는 부잔교

"일본은 한반도에서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범했으며, 조선을 종속시키려 했고, 결국 한국을 강점함으로써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버렸는데, 우리 조동종은 그 첨병이 되어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우리는 맹세한다. 두 번 다시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동국사 경내에 비석으로 세워진 조동종 종무총장의 참회·사죄문의 일부다.

군산의 근대는 시간이 멈춰선 게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양심에 걸러진 시간은 미래로 흐르고 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군산 기행은 더없이 값지다.


# 영화·드라마 50여편 촬영지

- '장군의 아들' '친절한 금자씨' '8월의 크리스마스'까지 찍다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군산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근대 풍경 등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다. '장군의 아들' '모래시계' '친절한 금자씨' '8월의 크리스마스' 등 지금까지 촬영된 영화나 드라마만 해도 50여 편에 이른다. 군산시가 '영화 속 그곳을 찾아라!'라는 영화·드라마 촬영지를 주제로 한 여행 코스를 개발해 선전할 정도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다. 1998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시한부 삶을 사는 사진사 정원(한석규 분)과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 분)의 잔잔한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내용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담아내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 품격 높은 멜로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았다.

촬영은 대부분 신흥동과 월명동 일대에서 이뤄졌다. 신흥동 주택가에는 정원이 운영하던 사진관이 있다. 가발공장 차고를 사진관 세트장으로 개조했는데, 관광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자 한 시민이 건물을 사들여 실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관 옆에는 다림이 타고 다니던 주차단속 차량도 전시해 놓았다. 정원이 어린 시절을 추억하던 월명동 서초등학교 운동장도 영화에 네 번 등장한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