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천왕상 대문 없고 누각이 입구
- 필요한 구조만 있을뿐 장식 없어

- 만세루 낮은 천장·둥글린 문턱
- 배려와 부처님에 공경심 환기
- 사랑채처럼 난간 있는 대웅전
- 맞배지붕 극락전 절제미 최고

- 부속 암자인 'ㅁ'자형 영산암
- 지형 높낮이 살린 3단 마당엔
- 가지뻗은 소나무·화단으로 운치
- 벽 없앤 우화루, 누마루와 연결
- 폐쇄적인 구조와 달리 아늑해

1300여 년의 비행. 의상(義湘·625~702) 대사가 시작한 '종이 봉황' 이야기다. 대사는 경북 영주 부석사에서 종이 봉황을 접어 하늘로 날렸다. 종이 봉황은 안동 천등산 기슭에 사뿐히 내려앉았고,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봉정사의 창건 설화다. 절은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 등 고려 중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7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목조건물 박물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종이 봉황의 비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물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화엄세계를 향해 지금도 계속 날아가고 있다. 지난 12일 그 비행을 보러 봉정사를 찾았다.

■여염집처럼 푸근한 절집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 큰 절에서 부속 암자인 영산암으로 올라가는 계단. 녹음이 우거져 터널을 이루고 있다.

먼저, 봉정사 창건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창건주가 누구인지를 두고 설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종이 봉황 설화를 근거로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주장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1972년 극락전 해체·복원 당시 "672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창건했다"고 쓴 상량문을 발견한 터라 이미 이 주장은 오류로 판명난 상태다. 기록과 설화를 종합해 보건대, 의상대사가 봉정사 절터를 점지한 뒤 그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봉정사의 특징은 절제와 소박이다. 장식보다는 기능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절집은 담백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때로는 고향집 같은 푸근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가장 큰 미덕은 절집 규모를 가능한 한 줄여 산지 훼손을 억제하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꾀했다는 거다. 봉정사 건축의 이런 매력은 절집 입구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 다른 고찰에 다 있는 사천왕상 대문을 이곳에선 볼 수 없는 게 그 하나다. 그 대신 누각(만세루)이 대문 구실을 한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허옇게 퇴색한 기둥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누마루를 받친 석단은 친할아버지처럼 정겹다. 누각은 앞면 2층, 뒷면 1층의 비대칭 구조다. 경사지를 파내지 않고 지형에 맞춰 누각을 세웠기 때문이다.

누각 밑 통로는 천장이 낮아 드나들 때 고개를 숙여야 한다. 부처님에 대한 공경심을 환기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낮은 천장을 감안한 보완 조치도 잊지 않았다.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문턱을 활처럼 둥그스름하게 아래쪽으로 구부린 데서 배려심이 읽힌다.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맞은편에 산을 등진 채 대웅전(국보 제311호)이 들어서 있다. 그 서쪽에 극락전이 같은 선상에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공간을 둘로 나눈다. 극락전은 고금당(보물 제449호)을, 대웅전은 승방인 무량해회를 각각 거느리고 있다.

극락전의 건립시기는 언제일까? "창건 이후 원감·안충·보조·신경·밀암 등 여섯 스님이 여섯 차례나 중수하였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 23년에 용수사의 축담 스님이 와서 중수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지붕이 허술하여 수리한다." 극락전 상량문에 나온 중수 내용이다. 여기서 '지금'이란 1625년(조선 인조 13), 지정 23년은 그로부터 약 260년 전인 1363년(고려 공민왕 12)을 말한다. 통상 건물 신축 후 150~200년 지나서 중수했던 것을 고려하면 건립시기는 13세기 초엽이나 12세기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화엄 평등세계 향한 비행

	국내 최장 목조건물 극락전.

극락전은 봉정사의 건물들 가운데 절제미가 가장 두드러진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집인 이 건물의 겉모습을 보면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댄 공포(栱包)는 필요한 구조만 있을 뿐 장식이 거의 없다. 문도 건물 전면 중앙에만 내고 그 양옆에 통풍·채광용 살창을 달았다. 건물 내부 역시 아미타불상 위에 닫집을 설치해 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치장이 간소하다. 전체적으로 투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표현을 아꼈다. 하지만 이런 절제가 오히려 단아한 정취를 자아내고, 기도공간의 경건함을 북돋운다. 극락전은 뒤편 산자락의 신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접점은 절제미다. 불심과 신록은 푸르름 하나로 만난다.

	영산암 송암당.

대웅전(국보 제311호)은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기단 위에 섬돌을 놓아 내부로 드나드는 다른 법당과 달리 이 건물은 전면에 좁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설치했다. 바둑판 같은 격자 문살을 댄 여닫이문의 운치도 담백하다.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사랑채를 보는 듯하다. 단청이 퇴색해 속살을 드러낸 나무들은 건물에 고졸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인 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지어졌다. 대웅전은 극락전보다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극락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식 건물이지만, 대웅전은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어 짜임새가 더 안정적인 데다 미관도 수려해서다.

	영산암 우화루와 송암당을 이은 통로.

고금당(古金堂·옛 금당)은 이름의 뜻이 재미있다. '금당'은 삼국시대에는 불상을 봉안하는 절의 중심건물이었는데, 이름대로라면 극락전과 대웅전이 들어서기 전 이 자리에 금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절의 중심이 대웅전으로 이전되면서 이름이 '고금당'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건물은 옆에서 보면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가 길게 뻗어 나와 큰 갓을 쓴 듯한 느낌을 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인 이 건물은 건립시기가 조선 중기로 추정된다. 화엄강당은 대들보 위에 빛을 들이는 작은 살창이 나 있는데,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다.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고금당과 규모와 구조가 유사하다. 두 건물은 현재 요사채로 쓰인다.

	봉정사 만세루 밑 통로.

봉정사는 부속 암자도 큰 절 못지않게 아름답다. 큰 절에서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영산암이 특히 빼어나다. 건립시기가 조선 후기로 추정되는 누각(우화루), 석가모니와 제자들을 봉안한 응진전, 요사채인 송암당과 관심당 등 전체 건물들의 구성이 'ㅁ'자형이다. 폐쇄적인 구조여서 답답할 수밖에 없는데도 실상은 딴판이다. 우화루 아래 통로를 거쳐 마당에 들어서면 사방으로 가지를 내뻗은 소나무가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데다 화단에선 갖가지 화초가 자라고 있어 화사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지형의 높낮이를 적절히 활용해 마당을 3단으로 만드는 한편 우화루의 벽을 없애고 송암당의 누마루와 통로를 연결시키는 뛰어난 공간처리 감각을 발휘해 구조적 단점을 해소한 결과다.

	봉정사 대웅전.

이 감각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감싸 안고 스며드는 공존의 지혜에서 나온다. 1300여 년 지속된 종이 봉황의 비행을 영속시킬 마르지 않는 동력이다.


# 절을 세운 뒤 눈 먼 사람들 없어져

■ 천등산 또다른 고찰 '개목사'

봉정사 외에 천등산 기슭에 있는 또 다른 고찰인 개목사에도 보물이 있다. 원통전(제242호)이다. 이 불전은 1457년(조선 세조 3)에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지붕집이다. 내부 천장에는 연등 모양의 윗부분이 노출돼 있으며, 중앙 뒷벽에는 작은 불단이 설치돼 있다. 절 왼쪽에 너비 1m가량의 두께로 쌓아놓은 돌담도 정겹다.

이 절은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천등굴에서 도를 깨친 뒤 세운 절이다. 원래 이름은 흥국사였으나, 절을 세운 뒤 안동 지방의 소경들이 사라져 이름을 개목사로 고쳤다고 한다. 산 이름과 관련한 '개목' 전설도 있다. 조선 초기 명재상이었던 맹사성이 안동의 지세를 둘러보고는 안동에 소경이 많은 이유가 천등산의 기운 때문이라고 하자, 산 이름을 개목산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다. 능인대사처럼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