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마·양잠 농사 짓던 임종국씨
- 평생 일군 재산에 빚까지 내 편백·삼나무 등 300만 그루 심어
- 빚 독촉에 쓰러져 세상 떠나…그 뒤 정부서 매입해 관리·보존

- 풍부한 피톤치드로 유명, 암환자 등 힐링 방문객 줄이어
- 숲길 다섯 코스 5시간 걸려

우직하게 일한 끝에 결국 산을 옮겼다는 우공은 고사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6·25전쟁 후 우리나라에도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에 걸맞은 이가 있었다. 20여 년간 300여 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민둥산을 373㏊의 광대한 숲으로 탈바꿈시킨 사람. 그리하여 절망과 패배의식에 절은 민심에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산림녹화의 불을 댕긴 거인. 춘원(春園) 임종국(林種國·1913~1987·사진)이 그 주인공이다.

전남 장성군 서삼·북일면에 있는 축령산 편백 숲길. 키가 20m를 웃도는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빼곡하다. 전국에서 공기가 가장 맑은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절정에 이른 5월의 신록이 눈부시게 빛나던 지난 5일, 춘원의 삶이 오롯이 배어든 전남 장성군 서삼·북일면 축령산을 찾았다. 그가 심고 가꾼 숲의 그늘은 넓고 짙었다. 탐방객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늘은 그들을 모두 넉넉히 감싸안았다. 그 그늘로 들어가는 축령산 숲 여행에는 춘원의 딸 순갑(67) 씨가 동행했다.

■농사로 번 전 재산 조림에 투자

춘원 임종국

서삼면 모암리 숲 입구에서 만난 순갑 씨는 기자에게 먼저 세 개의 압화(押花) 책갈피를 건넸다. 납작하게 눌러 말린 야생화에 비닐을 씌운 책갈피의 아랫부분에는 춘원의 사진과 업적이 간략히 기재돼 있었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그는 2012년 고향인 축령산 기슭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 압화 공예와 농사를 짓는 틈틈이 숲해설사 일을 병행하고 있다. 그는 춘원의 6남 3녀 중 둘째다.

"축령산 숲은 전문기관의 검사 결과 국내에서 가장 공기가 맑은 숲으로 나타났어요. 그래서 2000년 '미래를 위해 보존해야 할 숲'으로 선정됐고, 2002년 산림청이 땅을 사들여 국유림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춘원은 1956년부터 1976년까지 축령산에 편백나무 250여 만 그루(202㏊), 삼나무 63만4000여 그루(87㏊), 밤나무 등 낙엽송 5만4000여 그루(84㏊)를 심었다. 산림청은 이곳에 산소숲길 1.9㎞, 숲내음숲길 2.2㎞, 건강숲길 2.9㎞, 하늘숲길 2.7㎞를 조성해 놓았다. 이 길을 전부 걷는데 약 5시간이 걸린다.

숲 여행은 산소숲길에서 시작했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숲 속으로 들어가니 한낮인데도 햇볕이 차단돼 어둑했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20m 이상 공중으로 곧게 뻗은 40~50년생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히 서서 일산을 펴듯 가지와 비늘잎을 펼쳐 하늘을 가렸기 때문이다. 탐방객들은 군데군데 설치된 벤치와 평상에 앉거나 누워 한가로이 산림욕을 즐기고 있었다. "아토피, 기관지염, 암환자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치유의 숲인 셈이죠." 순갑 씨는 현재 함께 지내고 있는 자신의 외삼촌도 이곳에서 천식을 치유했다고 덧붙였다.

춘원은 왜 편백·삼나무 조림을 했을까? 순갑 씨에게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먹고 살거리가 궁해진 사람들이 나무를 마구 베면서 산이 황폐해졌어요. 그 바람에 산사태가 일어나 우리 집도 애써 가꾼 농장이 파묻히는 피해를 보게 되자 선친께서 조림에 눈을 돌리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감나무와 밤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었는데, 광주 무등산 증심사 골짝에 조성된 편백림을 보시고는 감동을 받아 편백과 삼나무로 수종을 바꿨다고 해요."

춘원은 조림에 뛰어들기 전 잠농과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타고난 근면성에다 관련 서적들을 두루 독파해 익힌 과학적인 영농으로 둘 다 큰 풍작을 거뒀다고 한다. 특히 고구마의 경우, 장성에서 '임종국' 브랜드는 양질의 채소로 정평이 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그렇게 모은 재산을 몽땅 조림에 쏟아부었다. "숲을 만들다니, 나무가 하루 이틀 만에 자라는 것도 아니고…정신이 이상해진 것 아냐." 이웃들은 냉소했다. 홍수와 가뭄 등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반평생 바쳐 산·나무·향기 되다

춘원 임종국의 수목장 묘지에 선 딸 순갑 씨

하지만 그는 24시간 조림지에 붙박여 지내면서 나무를 돌보는 억척 끝에 마침내 성공의 기틀을 닦았다. 1968년에는 3000만 그루의 묘목을 생산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냉소했던 이웃들도 조림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미리 계산하고 재배하려니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심고 나서 가꾸는 일을 걱정합시다." 1969년 춘원은 자신의 조림지에서 열린 독림가 대회에서 이같이 역설했다. 조림 사업가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돈 되는 나무를 심자'고 주위에서 권하면 선친은 '돈을 앞세우지 말고 마음을 앞세워라. 돈을 앞세우면 사람이 망가진다'고 타이르셨고, 한 번 고용한 일꾼은 본인이 스스로 나가지 않는 한 끝까지 함께하셨어요. 우리 집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해 잘 됐습니다." 순갑 씨는 춘원의 성공 동인으로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훗날을 내다보는 끈기와 사람에 대한 강한 신뢰를 꼽았다.

그러나 외부 투자나 지원 없는 단독 사업에 한계는 불가피했다. 조림은 본래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어 손자가 거두는 3대 사업인데, 묘목 인건비 등 투자는 갈수록 늘어나는 반면 수익은 이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던 까닭이다. 춘원은 나무와 임야를 담보로 빚을 얻고 논밭과 집까지 팔아 나무를 심다가 1979년 조림지를 채권자에게 넘긴 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8년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춘원의 업적을 적은 압화 책갈피.

임야를 인수한 지주들은 춘원이 땀 흘려 기른 나무를 베어냈다. 이러다 국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조림지가 결딴날 것을 우려한 산림청이 사유지를 사들여 국유화했고, 그렇게 지킨 숲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친이 쓰러지기 전에는 우리 남매는 물론 어머니조차 재산이 얼마인지, 빚이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철저히 선친 혼자 감당하시다 가신 거죠. 평소 '나무를 탐내지 마라. 조림은 나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며 자식들이 사업을 물려받는 것도 바라지 않으셨어요."

순갑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2㎞가량 걷다 보니 숲 안내센터에 이르렀다. 센터 앞에는 춘원의 조림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거기서 방향을 틀어 1㎞쯤 가면 춘원의 수목장 묘지가 있다. 작고 후 고향 순창의 선영에 매장했으나 고인의 뜻을 받들어 축령산 숲 느티나무 아래로 이장한 것이다. 국내 두 번째 수목장이었다. 인근에는 2012년 남편을 뒤따른 춘원 부인의 수목장 묘지도 있다.

'스스로 산이 되고/나무가 되고/향기가 됐던 님!…끝내는 축령의 산신 되어/편백향으로/세인 맞으시는 님!…'. 춘원의 묘지 옆에 세워둔 팻말에 적힌 추모 시구다. 그의 묘지에는 추모객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기자가 그랬듯, 시를 본 추모객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산·나무·향기가 된다는 데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것이다. 그때마다 마음의 숲은 더욱 울창해질 것이다. 서로를 위할수록 행복해지는 '더불어 숲' 말이다.


# 투박한 원덕리 미륵석불, 춘원의 우직함 닮았구려

축령산 숲에서 8㎞쯤 떨어진 북이면 원덕리에는 춘원과 닮은 돌부처가 있다. '미륵석불(사진)'이다. 고려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은 불상이라기보다 마을을 수호하는 장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지붕돌 모양의 관을 쓰고, 몸통은 두 개의 직육면체 석재를 쌓아 만들었다. 눈은 왕방울처럼 크고 둥글게 선각한 데다 법의 또한 비입체적으로 밋밋하게 새겨 촌티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이런 서툴고 투박한 조각 솜씨가 오히려 좌우 한눈팔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춘원의 마음과 겹쳐진다. 석불에 얽힌 전설도 이런 정서를 뒷받침한다. 마을 처녀를 짝사랑하던 한 총각이 처녀가 죽자 비통해하며 바위에 처녀의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위가 워낙 가팔라 눈썹만 조각하고는 그만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를 안타까워한 마을 사람들은 바위가 잘 보이는 곳에 석불을 세웠다. 처녀·총각의 애틋한 사랑과 이를 보듬는 마을 사람들의 온정은 서로 그늘이 되려는 숲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석불에는 또 다른 전설이 내려온다. 6·25전쟁 때 인민군이 쏜 총알이 석불에 박혔는데, 어떤 효성 깊은 아들이 이를 빼내어 어머니의 병을 고쳤다는 내용이다. 그 이후 석불의 영험이 널리 알려지면서 요즘도 아들을 못 낳는 여인들이 기도를 드리러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