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재 선생은 우담의 정치적 스승
- 왕에게 쓴소리 마다치않는 기개 배워

- 안강읍 산자락에 위치한 옥산서원
- 700m 떨어진 곳엔 회재 별당이…
- 우담이 들러 "이런 회포 또 있으랴"

여행 만한 인생의 교과서가 있을까. 그 본보기를 조선 후기의 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1625~1707)에게서 발견한다. 3년에 걸친 그의 국토 기행은 걸음걸음 피와 살이 되는 산지식이었다.

	회재 이언적의 별채 '계정' 앞을 흐르는 시내. 냇가 곳곳에 너럭바위가 산재한 데다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들이 빼곡해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그 가운데 1688년 5월 영남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고향인 경주를 여행한 것은 아주 특별하다.

회재의 사상이 우담의 정치적 실천의 뼈대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그들의 자취를 더듬어 경주로 떠났다. 그 길에는 곱게 단장한 봄이 마을 어귀에 나와 손님을 맞이했다.

■'민심이 천심' 면면한 민본사상

	옥산마을 어귀 소나무들

먼저, 두 사람의 사상적 관계부터 살펴보자. 평생 은거를 고집한 우담의 정치적 실천은 사직상소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게 국토 대장정을 끝낸 지 3년 후인 1691년(숙종 17) 올린 '사진선겸진소회육조소(辭進善兼陳所懷六條疏)'다. 세자시강원 진선 직을 고사하면서 올린 시국 비판 상소로, 그 내용이 자못 신랄하다.

"옛사람은 서로 관계를 끊을 때 그 은의를 온전히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마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었는데, 이제 전하께서는 슬퍼하시는 뜻이 없고, 도리어 박절하게 은혜를 적게 하시니 안팎의 인심이 답답하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숙종이 자신의 정비인 인현왕후를 서인으로 강등해 궐밖에 내친 것을 나무라는 내용이다.

"간하는 신하를 박살한 임금은 과연 어떠한 임금이겠습니까? 형틀 아래의 참혹한 정상은 보는 이들의 넋을 잃게 했으니, 천고에 보기 드문 과오입니다." 우담은 인현왕후의 폐비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고문해 죽인 것을 꾸짖기도 했다. 격노한 임금은 우담에게 제수한 관직을 삭탈했다. 우담은 특히 남인이면서도 서슴없이 자파가 저지른 폐비의 부당성을 공박해 눈길을 끈다. 당파를 떠나 오직 정의의 편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려는 지식인의 양심과 책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옥산서원 강당

우담의 지사적 의식과 기개는 회재에게서도 볼 수 있다. 회재는 사헌부 사간으로 재직하던 1533년 자신의 아들을 중종의 사위로 들인 권신 김안로에게 세자를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맡기자는 조정의 논의에 반대하다 파직됐다.

5년 후 복직해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근본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10가지 대책을 밝힌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린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의리에 맞고 많은 사람의 정서에 화합하면 반드시 천심과 합치할 것이다." 그는 민심을 천심으로 보고, 군심이 민심에 부합하면 천심과도 합치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회재는 1547년 척신 윤원형의 참소로 관직을 잃고 변경인 평안도 강계로 유배돼 지내다 숨진다. 참지성은 오욕의 된서리를 떨치고 피어나는 것일까. 회재는 6년 남짓한 유배기간 주희의 '대학장구'를 비정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조선조 예학의 선구가 된 '봉선잡의(奉先雜儀)' 등 우리 유학사의 기념비적인 저작들을 남겼다. 회재와 우담의 마음에는 '민본의 강'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발 닿는 곳마다 선현 자취 오롯

	양동마을에 있는 회재 종가 무첨당

회재의 고택이 자리한 안강읍 옥산리로 간 날, 마을 어귀에는 기품 어린 소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서 손님을 반겼다. 두 그루는 하늘로 몸을 죽 뻗었고, 나머지 한 그루는 등이 굽은 것을 보아 노소동락을 상징하는 듯했다. 100m가량 위쪽에는 아름드리 키 큰 소나무들이 마을 만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회재가 타계한 지 19년 뒤인 1572년 창건된 옥산서원은 인가와 떨어진 자옥산 자락에 있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강당·사당·누각·부속건물이 짜임새 있게 배치된 데다, 서원 앞에는 시루떡처럼 층층이 쌓인 거무스름한 너럭바위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흘러 그윽한 정취를 자아냈다. 너럭바위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글씨 '세심대(洗心臺)'가 새겨져 있었다.

	회재 신도비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인 문루 '무변루(無邊樓)'와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쌓은 기단 위에 같은 기법으로 지은 강당 '구인당(求仁堂)'은 긴 세월 서권기(書卷氣)의 세례를 받아서인지 자못 단아했다.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 ~ 1605)의 문루 현판글씨(무변루)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강당 현판글씨(옥산서원)는 거기에 고졸한 아름다움을 더했다.

우담은 "귀부(龜趺·거북 형상의 비석 받침돌)의 정교한 조각은 일찍이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며 사당 옆에 있는 회재신도비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옥산서원의 권위를 높이는 으뜸요인은 방대한 장서였다. 현재 '대학장구보유' 등 회재의 친필 저서 13책(보물 제586호)를 비롯해 4000여 권이 소장돼 있는데, 많을 때는 1만여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독락당 담장의 살창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쯤 떨어진 곳에는 '독락당(獨樂堂·보물 제413호)'과 '계정(溪亭)'이 있었다. 독락당은 회재가 1533년 파직 후 지은 별당 겸 서재다. 계정 아래에는 돗자리를 깐 듯 표면이 고른 너럭바위가 있었고, 시내 건너편 산기슭에도 여기저기 크고 작은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냇물에 발을 적시고 있었다.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징심대(澄心臺)' '탁영대(濯纓臺)'…. 회재는 너럭바위마다 이름을 붙여놓았다. 그 바위들을 소나무와 대나무가 빼곡히 감싸고 있어 시내에는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독락당 담벼락을 헐어 만든 살창이 돋보였다. 시내의 경치를 집 안에서 볼 수 있게 한 독특한 건축 아이디어였다.

우담은 서원 앞 시내를 거슬러 계정에 올라 경치를 완상한 뒤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숙연하여 삼가면서 구경하니, 선생(회재)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모시고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보기 드문 회포가 일었다."

■영남의 우뚝한 풍류와 학문

회재는 불우한 말년을 보냈지만 그리 외롭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입 안의 혀처럼 아버지를 공경했던 효자 아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회재의 아들 잠계(濳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은 강계에서 아버지를 모시며 유배생활을 함께했다. 회재가 타계한 뒤에는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3개월여에 걸쳐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했다. 운구기간이 길었던 것은 회재를 모함한 윤원형이 살고 있는 한양을 피해 함경도와 강원도 해안길로 둘러서 와야 했던 탓이다.

현재 옥산서원 창고에는 460여 년 된 대나무가 보관돼 있다. 썩어서 색깔이 검게 변한 이 대나무는 잠계가 아버지의 시신을 운구할 때 썼던 지극한 효성의 흔적이다. 잠계의 효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회재가 유배지에서 성군이 되기 위한 8가지 치국요점을 적은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상소문과 함께 당시 임금인 중종에게 바쳤다. 이를 본 임금은 자신의 처벌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회재를 복권시켰다.

옥산마을을 둘러본 우담은 5㎞가량 떨어진 강동면 양동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회재가 나고 자란 곳이다.

"선생의 손님방에 올라 두루 바라보니 담장은 무너지고 집은 기울어져 슬픈 느낌이 일었다."

여강 이 씨의 종가인 '무첨당(無忝堂)'의 누마루에 앉은 우담은 존경하는 회재의 집이 피폐해진 것을 보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회재가 세상을 떠난 뒤 가세가 기울었던 모양이다. 현재 무첨당은 보물 제411호로 지정돼 후손이 살면서 잘 관리하고 있다. 누마루에 서니 옹기종기 정겹게 몸을 맞댄 집들과 고즈넉한 논밭이 내려다보였다. '좌해금서(左海琴書)'. 마루 오른쪽 문 위의 현판글씨가 인상적이다. '영남의 우뚝한 풍류와 학문'이란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 파락호 시절 대나무를 깎아 쓴 것이다. 그래서인지 필치가 사뭇 날카롭고 거침없다. 회재와 우담의 기개를 보는 듯하다. 세월이 흘러도 그 기개는 변함없이 푸르다. 그 푸르름이 있기에 우리의 여행은 즐겁고 설렌다.


# 기존 통일신라탑과 좀 달라요…독락당 인근 정혜사지13층탑

독락당에서 500m쯤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도덕산 기슭에 '정혜사지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重石塔·국보 제40호·사진)'이 있다.

9세기 무렵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5.9m 높이의 이 탑은 건축양식이 동시대에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다. 흙 기단 위에 13층의 몸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1층 몸돌이 거대한 반면 2층부터는 크기가 급격히 줄어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절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우담이 들렀을 때는 온전했다. "절은 신라시대에 창건됐는데 기울지 않고 튼튼했다. 옥산서원이 지어진 뒤 원호사(院護寺·서원을 지키는 절)가 됐다. 절 앞의 바위는 기이하고 절묘했는데 계정의 상류였다." 우담의 '산중일기'는 조선 후기 불교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국 명산의 고찰을 두루 답사한 뒤 본대로 기록해 놓았는데, 정혜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