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곡 봉비암- 암봉이 감싸 안은 서원엔 선비정신 깃들어

- 경북 성주 수륜면~김천 증산면
- 35㎞에 이르는 대가천 절경 9곳
- '무흘구곡'에 한강선생 자취 담겨

- 사색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며
- 인간 도리의 근원 접근하는 과정
- 그 길을 우담과 우리가 따라간다

	2곡 한강대- 바른 마음과 이를 실천할 곧은 기개…자신의 호 따올 만큼 비범한 절경

생각은 '발'로 해야 한다. 실천을 수반하지 않은 생각은 공허하다. 조선 후기의 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 3년간 전국을 돌며 '길 위의 사색'에 매달린 이유다. "발로 걷고 손으로 잡아야 할 때 걷고 잡는 게 바로 도(道)"라는 그의 실천철학은 거기서 나왔다. "간(諫)하는 신하를 박살 낸 임금은 과연 어떠한 임금이겠는가"라며 광해군의 임금 자질을 문제 삼은 목숨 건 직언 또한 같은 맥락이다.

1686년 4월 2~5일, 우담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자취를 찾았다. 한강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과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학문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조선 중기의 대학자다. 그의 자취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서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까지 35㎞에 이르는 대가천의 절경 9곳을 일컫는 '무흘구곡(武屹九曲)'에 오롯하다. 그가 지은 구곡의 시에는 호연지기가 꿈틀댄다. 지난달 25일, 그 호연지기를 좇아 대가천 하류에서 무흘산(현 수도산) 골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숲 청청 물 청청 마음도 청청

	3곡 배바위- 뾰족히 솟은 모양…정박지로 역할

1곡인 신정리 '봉비암(鳳飛岩)'으로 가는 길은 매화 향기가 이끌었다. 한강이 인재를 양성하려고 회연초당을 짓고, 그 앞뜰에 100그루의 매화를 심어 조성한 백매원(百梅園)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였다. 초당은 한강의 제자들이 세운 같은 이름의 서원으로 탈바꿈했다.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우뚝 솟은 봉비암의 경치는 '삼창(三蒼)의 명승'이었다. 깎아지른 암벽 위에 우거진 솔숲이 푸르고, 벼랑이 발을 담근 물 또한 푸르며, 암봉이 가슴을 열어 감싸 안은 서원에 깃든 정신까지 푸르다는 말이다.

'일곡 여울목에 낚시배 띄우니(一曲灘頭泛釣船·일곡탄두범조선)/석양 물든 냇가에 실바람 감도네(風絲繞繞夕陽川·풍사요요석양천)/누가 알리오, 세상 근심 다 버리고(誰知捐盡人間念·수지연진인간념)/박달나무 삿대 잡고 물안개 헤쳐가는 것을(唯執檀漿拂晩煙·유집단장불만연)'. 시에서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한강의 마음이 묻어난다.

2곡 '한강대'는 봉비암과 직선거리로 1㎞ 남짓 떨어진 창평산 등성이에 있다.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세상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는 게 사명인 듯 굽은 가지를 사방으로 내뻗은 소나무가 즐비한 데다 산을 휘감아 도는 물줄기도 그윽해 산세가 자못 비범했다. 한강이 2곡의 이름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는 논어의 글귀에서 따온 뒤 자신의 호로 삼은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4곡 선바위- 30m 높이 기이한 자태 뽐내는 모양새

'아름다운 아가씨 봉우리 되어(二曲佳妹化作峰·이곡가매화작봉)/봄꽃 가을잎으로 얼굴 단장하네(春花秋葉靚粧容·춘화추엽정장용)/그때 만일 굴원에게 알릴 수 있다면(當年若使靈均識·당년약사영균식)/이소 한 구절 덧붙일 것을(添却離騷說一重·첨각이소설일중)'. '영균'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자이고, '이소'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나라에서 쫓겨난 굴원이 지은 근심 어린 시다. 한강은 시에 굴원을 끌어들여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이는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였을 당시 그의 비탄과 겹쳐진다.

"대궐 내에서 역모를 주도하고 대궐 밖에서 호응했다는 설을 날조하더니 결국 대군을 죽이고 자전(慈殿·임금의 어머니)을 폐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니, 너무 지나치다. 소인이 빚어내는 재앙이여! 천도가 없어지고 인륜이 끊어졌다. 온 나라 군신이 이제 모두 천하와 만고에 무궁한 비난을 받게 됐으니, 어찌 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한강은 앞서 이런 사태를 미연에 막으려고 상소했다가 자신의 아들이 날 선 내용 때문에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해 조정에 글을 올리지 않자 그 전말을 밝히며 다시 상소하기도 했다. 우담이 못내 그리워했던 한강의 자취는 그런 바른 마음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기개였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대가천의 경치는 더욱 기이한 자태를 뽐냈다.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의 '배바위(3곡)'는 산줄기와 뚝 떨어져 굽이치는 냇가에 20m가량 뾰족하게 솟은 모양새가 그 일대 산수의 중심임을 선포하는 듯했다. 옛날 대가천을 오르내리던 배들을 매는 정박지 노릇을 하기에 충분했다. 배바위에서 2㎞쯤 위쪽에 자리한 '선바위(4곡)'는 하천 바닥에까지 굳건히 내려선 밑동 위에 다섯 층으로 쌓인 게 꼭 석탑을 닮았다. 키가 배바위보다 10m 이상 큰 데다 몸매도 늘씬해 미관은 더 수려했다.

■모두가 휴머니즘 여행의 동반자

	5곡 사인암- 관인을 버리고 정착했다는 전설 내려와

선바위를 지나면서 냇가의 벼랑은 더 높아지고 계곡은 깊이를 더해갔다. 선바위에서 3㎞가량 올라가니 냇가에 널따란 암반이 펼쳐졌다. 고려시대 한 관리가 풍광에 반해 관인(官印)을 버리고 정착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사인암(捨印巖·5곡)'이다. 물살 센 계류에 얼마나 오랜 세월 마모됐는지 암반은 백옥처럼 희고 윤기가 흘렀다. '복건 쓴 이 높은 당 위에 앉아(幅巾人坐高堂上·복건인좌고당상)/인심과 도심 얘기하네(講說人心與道心·강설인심여도심)'. 시구에 나오는 복건인은 암반에 모여 앉은 제자들 앞에서 도학을 강론하는 한강인 듯하다.

	6곡 옥류동- 무흘산 골짜기서 굽이굽이 내려온 물

우담은 구곡의 절경을 완상하는 틈틈이 한강이 편찬한 '심경발휘(心經發揮)'를 읽었다. 심경은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가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글을 뽑아 묶은 책인데, 한강은 여기에다 주희(朱熹)를 비롯한 제가의 학설을 보태 뜻을 풀이했다. 우담이 심경발휘를 애독한 것은 한강이 당대 최고의 심학 대가였기 때문이다. '중국 사신이 와서 동방심학의 으뜸이 누구냐고 묻거든 한강의 심경발휘라고 답하자고 조정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숙종보감(肅宗寶鑑)의 기록이 이를 증언한다.

6곡 '옥류동(玉流洞)'부터는 행정구역이 김천시로 넘어간다. 사인암에서 2.6㎞가량 떨어진 증산면 유성리의 옥류동은 무흘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흰 암반 위를 옥처럼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7곡 '만월담(滿月潭)'을 찾는 데는 적잖은 발품을 팔아야 했다. 수도암 가는 길로 접어들어 평촌리 장평마을에서 도로를 따라 1㎞쯤 산 쪽으로 올라가면 길가에 만월담 표지판이 서 있다. 하지만 그곳은 만월담이 아니었다. 최근 김천시가 전문가로부터 새로 장소 고증을 받은 결과 500m가량 더 위쪽에 위치한 계곡인 것으로 드러나 표지판 교체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7곡 만월담- 물에 비친 달 보며 군자의 심법 헤아려

시 관계자가 알려준 곳에 가 보니 맑은 물이 못을 이루고, 그 바닥에는 고동색 자갈이 넓게 깔려 있었다. 한강은 보름달이 휘영청 뜬 가을밤에 만월담 주위를 거닐며 못에 비친 달을 두고 "천 년을 전해온 군자의 마음"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 등 성현들이 살다 간 시간적 차이는 천 년이 넘지만 이들이 전수한 심법은 만월담에 잠긴 달처럼 밝다는 뜻이다. 그가 평소 심성 수양에 얼마나 진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8곡 와룡암- 바위 위에 앉아 사심을 비우고 명상하다

한강은 무흘산 산중에 조촐한 집 한 채를 지어 '무흘정사'라고 명명했다. 또 정사 앞의 시내 위에 나무로 다리를 놓고는 '비설교(飛雪橋)'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회연초당과 이곳을 오가며 공부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선생의 서당 왼쪽에는 판잣집 네 칸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한강집 등 목판들과 책장 26개가 있었다. 계곡 주변에는 솔숲이 어둑할 정도로 무성해 정취가 고요하고 그윽했다." 무흘정사를 방문한 우담은 계곡과 숲 을 둘러보고는 이곳 산수에 대해 "하늘이 대현(大賢)에게 내린 복"이라고 했다. 그런 무흘정사가 아직 만월담과 8곡 '와룡암(臥龍岩)' 중간에 남아 있지만 돌보는 이가 없는지 폐허로 방치된 상태다.

	9곡 용소-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세찬 물줄기가 장관

와룡암은 계곡 바닥을 뒤덮은 너럭바위가 이름처럼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마음을 여니 눈도 활짝 열리고(八曲坡襟眼益開·팔곡파금안익개)/냇물도 흘러가다 되돌아오는 듯하네(川流如去復如廻·천류여거복여회)'. 와룡암 위에 앉은 한강은 마음을 비웠다. 사심이 사라지니 만물의 이치가 물 흐르듯 자명해진다. 9곡은 용이 승천했다는 '용소'다. 17m 높이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세찬 물줄기가 장관을 연출했다. '근원에는 말로 못할 묘리가 있나니(源頭自有難言妙·원두자유난언묘)/이곳을 버리고 어디서 별천지를 찾을까(捨此何須問別天·사차하수문별천)'. 한강은 용소에 이르러 마침내 도의 근원을 본 듯하다. 그 도저한 경지를 짐작하긴 어렵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간의 도리를 다하려는 치열한 모색과 실천을 통해서만 근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거다. 한강과 우담은 물론 우리 모두가 그 길 위에 선 여행자가 아닐까?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