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제색과 시화상간, 그리고 인왕산-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본 인왕산. 아래 그림은 '인왕제색'(오른쪽)과 '시화상간'. 둘 다 겸재와 사천의 우정을 담은 작품이다.

- 그림을 보내면 시를 쓰고
- 시를 보내면 그림을 그렸다
- 그러다 한명이 몸져눕자
- 친구는 쾌유를 빌며 산을 그렸다

- 이것이 겸재와 사천이
- 60년 우정을 표현하는 방식
- "하늘이시여 부디 살려주소서!"
- 비원이 서린 그림 속 암봉은
- 신처럼 성스럽고 장엄하다

그림을 보내면 시를 썼고, 시를 보내면 그림을 그렸다.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핍진하게 드러낸 '진경시화(眞景詩畵)'였다. 그런 세월이 장장 60년. 마침내 시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시가 되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과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 중국의 사상과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주체의식이 성숙해 가던 조선 후기, 진경시화운동을 이끌어 우리 문예사의 신기원을 연 두 대가의 우정 이야기다.

1751년 5월, 사천은 노환으로 몸져누웠다. 사경을 헤매는 사천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겸재는 비 갠 인왕산처럼 지기가 병석을 털고 일어나길 간절히 빌며 화선지에 필묵을 휘둘렀다. 불후의 명작 '인왕제색(仁王霽色·국보 제216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중부 지방에 신춘 서설이 내린 지난달 28·29일, 지기의 쾌유를 염원하는 겸재의 애타는 마음이 서린 서울 인왕산을 찾았다.

■60년 지기 쾌유 염원

인왕산은 종로구 옥인·누상·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38m에 불과하다. 하지만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뤄진 데다 정상부에 거대한 암봉이 돌출돼 있는 등 기세가 자못 웅장해 유수의 명산으로 꼽힌다. 북악산(北岳山·342m), 남산(南山·262m), 타락산(駝駱山·125m)과 함께 서울의 4대 진산으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인왕산은 경복궁·청와대 뒤편에 자리한 북악산과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다. 겸재가 살았던 북악산 서쪽 기슭의 유란동(현 서울 종로구 청운동)과 사천의 거주지였던 북악산 남쪽 기슭의 대은암동(현 세종로 산 1번지)에서 인왕산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겸재는 어릴 적부터 인왕산을 즐겨 그렸다. 진경산수화의 모태나 다름없는 곳이다. 겸재는 그런 인왕산을 76세의 고령에 마지막 힘을 모아 화폭에 담았다.

그림을 보면 상단 중앙의 암봉이 먼저 눈에 쏙 들어온다. 큰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수직에 가까운 사선으로 북북 쓸어내렸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여러 차례 덧칠해 시커먼 암봉을 표출했다. 암봉 아래엔 수직으로 붓질한 깎아지른 벼랑이 있고, 좌우에는 흙산을 뚫고 나온 온갖 기암이 즐비하다. 먹의 농도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을 띤 데다 붓질의 속도가 빠르고 각도 또한 수직이거나 경사가 심한 사선이어서 무쇠처럼 단단하고 강인한 인상을 준다.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폭포수도 세 줄기나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붓을 옆으로 뉘어 툭툭 치듯이 농담을 달리해 가며 먹칠한 오른쪽 하단과 중간의 솔숲도 물기에 젖어 후줄근하다.큰비가 그친 뒤 막 개어가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장면을 포착해 화폭에 옮긴 것이다. 안개는 화면 밑에서 피어올라 상·하단을 양분하듯 중간으로 가로지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주변에 물을 바른 뒤 먹을 먹여 번지게 하는 '바림' 기법으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게 해 신비감을 더한다.

사천의 집일까. 솔숲에 둘러싸여 씻은 듯 정갈한 기운을 발산하는 오른쪽 하단의 기와집 한 채가 특히 인상적이다. 비는 사천의 병고를, 우뚝 솟은 암봉과 기와집은 그의 쾌유와 편안한 여생을, 안개는 새 삶을 낳는 무한한 가능성을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굳센 의지로 고난을 극복한 뒤 카타르시스(정화)를 얻는 모습이다. 주역의 대가답게 겸재는 절묘한 음양의 조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사천은 끝내 육신의 궂은비를 물리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버렸고, 겸재의 절절한 묵필기도만 그림으로 남아 우리에게 참된 우정을 일깨우고 있다.

■비원 서린 암봉 장엄

지난달 28일 오전, 인왕산이 정면으로 올려다보이는 종로구 누상동 수성동계곡에 가 보니 암봉은 그림처럼 우람했다. 풍수상 부여된 우백호의 방위역할을 하늘이 무너져도 수행하겠다는 듯, 언제든 달려나갈 태세로 흰 등줄기를 곧추세운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듬성듬성 성글게 뿌리 내린 암봉의 소나무들과 주위 흙산의 푸른 솔숲은 뚜렷한 색채대비로 암봉의 우뚝함을 도드라지게 했다.

하지만 인왕산 실경(實景)에는 그림과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실경의 분위기가 그림만큼 강렬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경과 비교하며 그림을 음미해 보면, 그 차이는 화재(畵材)에 혼을 싣는 겸재의 전신사조(傳神寫照) 화법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비는 으레 짙은 안개를 동반한다는 일반적인 기상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하늘과 땅처럼 뚜렷한 시커먼 암봉과 희디흰 안개의 흑백대비에서 겸재의 강한 의취(意趣)가 묻어난다. "하늘이시여, 부디 사천을 살려주소서!" 겸재의 비원이 서린 암봉은 신처럼 성스럽고 장엄하게 다가온다.

2011년 복원된 수성동계곡은 겸재의 그림 '수성동'처럼 정갈하고 호젓했다. 그림에 등장하는 길이 1.5m가량의 돌다리도 옛 모습 그대로 계곡 위에 가로놓여져 있었다. 그림 상단의 푸른색조로 바림한 경물은 인왕산 암봉이다. 4명의 화중인물 중에는 겸재와 사천도 있을 것이다. 그림은 화창한 봄날 겸재 일행이 돌다리를 건너 인왕산으로 나들이 가는 장면이다.

이날 오후 인왕산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해 북촌과 겸재의 집터가 있는 경복고에도 들렀지만 서설이 산을 가려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인왕산의 설경을 보는 가외의 소득을 올려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북촌에서 본 인왕산은 흐린 하늘과 한몸이 돼 있었다. 암봉과 흙산이 모두 눈에 덮인 데다 윤곽마저 희미해 그 당당한 직립의 위용은 볼 수 없었다.

경복고로 장소를 옮겼을 때 눈발은 더 굵어졌다. 북악산 자락이 다리를 쭉쭉 뻗듯이 내려온 아담한 교정 한편에 '화성겸재정선의집터'라고 새긴 돌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비석에는 겸재가 52세 무렵 그린 자화상 '독서여가'가 판화처럼 조각돼 있었다. 쥘부채를 쥐고 사랑채 마루에 앉아 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림을 구상 중인 그림 속 겸재는 한가로워 보였다. 눈은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며 겸재의 집터에 시나브로 쌓였다. 사천이 이승을 하직한 해 어느 눈 내린 날처럼 사천을 앞서 보낸 겸재의 슬픔도, 겸재를 두고 먼저 떠난 사천의 애틋함도 눈에 묻혔다.

눈이 갠 이튿날, 인왕산을 보러 다시 북촌으로 가는 길에 경복궁에서 인왕산을 만났다. 눈 녹은 인왕산은 언제 눈이 내렸느냐는 듯 봄볕을 쬐며 늠름한 자태로 경복궁을 굽어보고 있었다. 겸재와 사천은 가고 없지만 인왕산은 영원히 변치 않을 진경을 드러내 우리의 허전한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시·그림 바꿔보는 지우

겸재와 사천의 우정이 오롯이 담긴 그림이 있다. 겸재가 양천현(현 서울 강서구 가양동) 현령으로 부임했던 1740년께 그린 '시화상간(詩畵相看)'이다. 화중인물 중 등을 보인 이가 겸재, 마주 보고 있는 이가 사천이다. 두 사람은 일산처럼 널따랗게 드리운 노송과 큼지막한 바위, 청량한 계류가 흐르는 산자락에 앉아 문방사우를 널어놓고 시화를 논하고 있다.

소나무·돌·물은 우정을 상징한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물을 '맑고 그칠 때 없는 벗', 돌을 '홀로 변치 않는 벗', 소나무를 '땅속 깊이 뿌리 내린 곧은 벗'이라고 노래했다. 고산은 소나무·돌·물에 달·대나무를 더한 다섯 사물을 영원한 우정을 나눌 만한 벗으로 꼽았다.

'내 시와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볼 적에(我詩君畵換相看·아시군화환상간)/둘 사이 경중을 어찌 값으로 따지겠나(輕重何言論價間·경중하언론가간)'. 그림 오른쪽 위에는 사천이 쓴 제화시가 적혀 있다. 사천이 시를 보내면 겸재가 그림을 그리고, 겸재가 그림을 보내면 사천이 시를 쓰는 '시화상간'의 우정을 나누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제화시 오른쪽의 낙관 글귀가 눈길을 끈다. '천금물전(千金勿傳)'. '천금을 준다 해도 그림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사천에 대한 겸재의 당부다.

양천현령으로 부임하는 겸재에게 준 사천의 전별시에서도 그들의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 다 허둥대네/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 보이누나/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시에 나오는 '망천(輞川)'은 당나라의 대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인 왕유(王維·699~759)의 별장이 있던 곳이라 '왕망천'은 곧 왕유를 지칭하는 말이다.

겸재와 사천의 도저한 우정사를 바탕으로 '인왕제색'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인왕제색의 진경은 무엇일까? 진경이 '진심'에서 발원한다면, 인왕제색의 진경은 '참된 우정'이 아닐까? 한 줄기 봄빛 같은 친구 사이 말이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