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산수화 '쌍계입암(위 사진 가운데)'의 배경이 된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의 입암(①선바위·위 사진 왼쪽)과 자금병 둔치(②위 사진 오른쪽). 아래 사진은 자금병과 입암 뒤 부용봉의 석벽이 석문을 이루는 모습.

- 경북 영양 입암이 그림 배경
- 우뚝 치솟아 화폭 찢고 나올 듯
- 실제보다 과장된 묘사는
- 혹한 뚫고 찾아온 봄을 상징

- 중국 화풍 벗은 전신화법으로
- 우리 산수 독보적 미학 완성

사물의 사실적 묘사는 실경(實景)일 뿐이다. 판박이처럼 밋밋한 사진이 심금을 울리는 예술성을 얻기 어렵듯, 사물에 깃든 혼이 드러나지 않은 그림은 '진경(眞景)'이 아니다. 핍진한 붓질로 화폭에 생명을 불어넣어야만 비로소 진경이 된다. 이른바 사물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담아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 화법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화에서 그런 전신화법의 도저한 경지를 볼 수 있다. 중국 화론에서 벗어나 우리 산수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표출한 그만의 독보적인 미학이다. 겸재의 그림이 울림 큰 감동을 안겨주는 이유다. 경상도 청하현감으로 일하던 1734년 그린 '쌍계입암(雙溪立岩)'이 한 예다.

이 그림이 인상적인 것은 혹한을 이겨낸 산수의 기세가 날선 창칼의 예기처럼 화면 가득 서려있어서다. 도대체 화재(畵材)로 삼은 산수와 그것을 본 겸재의 정감이 어떠하기에 이토록 골기가 하늘을 찌르는 걸까. 시나브로 봄 내음이 짙어지던 지난달 16일, 280여 년 전 겸재가 매료됐던 그 산수를 찾아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로 신춘여행을 떠났다.

■하늘 찌르는 선바위 기세

그림을 보면 화면을 양단하듯 기이한 형상의 선바위(입암)가 날카롭게 우뚝 치솟아 있다. 화폭을 찢고 나올 기세다. 제힘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듯 머리부분이 왼쪽으로 휘어져 있다. 바위의 테두리와 표면의 굴곡은 서릿발처럼 예리하고 모진 상악준(霜鍔皴)의 필치로 짙고 길게 내리긋고, 굴곡 사이에는 마른 붓으로 엷게 쓸어내려 질감을 나타냈다. 바위의 밑부분은 화면의 왼쪽 아래에까지 차도록 넓게 뻗어 있고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지만 미사일의 탄두처럼 굵고 억세다. 테두리와 굴곡 면에 좁쌀처럼 찍은 점들은 바위에 기생하는 식물이다.

선바위의 양옆에는 그보다 키가 작은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암벽의 표면에도 짙은 테두리 아래로 엷은 먹선을 세로로 길게 그어 깎아지른 수직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벼랑 위에 듬성듬성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데다 아래에는 그보다 울창한 숲이 형성돼 있어 선바위에 비해선 기세가 덜 위압적이다. 선바위와 암벽 앞에는 하천이 오른쪽 중간에서 왼쪽 아래로 비스듬히 흐른다. 바위에 부딪혀 생기는 물결무늬를 보면 물살이 만만치 않다. 기암과 암벽은 양기를, 나무·숲·강물은 음기를 각각 상징한다. 음양은 서로 삼투하며 중용을 이룬다.

이를 하천 건너 숲 아래 앉거나 선 두 사람이 보고 있다. 그림의 시점은 두 가지다. 선바위와 암벽은 올려다본 것이고, 맞은편 둔치의 사람과 숲은 내려다본 것이다. 겸재가 둔치에서 선바위와 암벽을 올려다보며 사생한 데 이어 둔치 뒤편 높은 곳으로 옮겨 둔치의 숲을 내려다보며 마저 그린 뒤 조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화중인물의 한 명은 겸재일 수 있다. 그린 시기는 초봄으로 여겨진다. 숲이 여름이나 가을처럼 무성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메마른 인상을 주는 데다 화중인물들이 추울 때 머리에 쓰는 휘항을 착용한 반면, 하천은 풀린 얼음물이 쏟아지듯 세차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겸재가 이 그림에서 담아내려 한 진경은 무엇일까? 골기탱천한 선바위나 파문이 이는 격류 등을 미루어 그의 마음은 기운생동하는 봄에 쏠려 있다. 특히 선바위의 덩치를 실제보다 키워 역동성을 강조한 데서 겸재의 그런 의지가 두드러진다. 선바위는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하천은 그 씨앗을 적셔 키운다. 그렇게 봄은 무르익어 간다.

■자줏빛 병풍벼랑 천혜절경

	정영방의 고택 안 서석지.

봄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전염성이 강한 모양이다. 겸재가 '쌍계입암'을 그린 곳으로 가던 날, 봄을 시샘하듯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겸재처럼 기자의 마음에도 햇살 찬란한 봄바람이 넘실댔다. 청송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다 영양읍에 이르기 전 일월산(1219m) 동쪽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서쪽에서 흘러나온 청기천이 몸을 섞는 너비 100여 m의 '남이포'를 만났다.

일월산은 남이포에서 역삼각형의 꼭짓점처럼 끝이 뾰족해진다. 이곳에서 두 하천의 상류 쪽으로 높이 100여 m, 각각 길이 1㎞ 남짓한 수직 벼랑이 뻗어 있다. 빼곡한 활엽·침엽수 숲을 머리에 인 벼랑은 군데군데 주황색을 띤 거무스름한 속살을 드러낸 게 위용이 자못 웅대했다. 벼랑 아래 하천가에는 호젓한 산책로가 뚫려 있어 운취를 더했다. '자줏빛 비단 병풍'을 뜻하는 '자금병(紫錦屛)'이란 이름이 딱 어울리는 경치였다. 하천으로 내려선 일월산 둔치에는 전망 좋은 '남이정(南怡亭)'이 세워져 있는데, 화중인물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둔치에서 맞은편을 보니 그림처럼 선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덩치가 커지는 다갈색 몸에 이끼류를 칭칭 감고 있는 게 겸재가 형상화한 모습보다는 작아 보였지만 발산하는 기세는 다를 바 없었다. 봉우리와 능선이 연꽃과 봉황의 날갯짓을 닮았다는 '부용봉(芙蓉峯)'이 자금병과 비슷한 높이와 길이의 석벽으로 선바위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영양현읍지는 부용봉과 자금병이 석문(石門)을 이루고 그 사이에 선바위가 있다고 해서 겸재와 달리 이들 경물의 이름을 '석문입암'이라 기록했다. 겸재가 '쌍계입암'이라 명명한 것은 두 하천의 합류가 불러일으키는 역동성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용봉 아래에는 1616년(광해군 8)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대해 직언하다 유배 온 율곡 문하의 수제자 약봉(藥峯) 서성(徐渻·1558~1631)이 지은 '집승정(集勝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았다.

약봉은 이곳이 고향인 당대 대시인 석문 정영방(鄭榮邦·1577~1650)과 깊이 교유했다. '고기잡이배 기다리느라/밤에도 사립문 잠그지 않았네/달 밝은 밤 수풀 아래로 보니/달빛이 집승정에 가득 찼네'. 휘영청 보름달이 중천에 떠 남이포와 석문을 환히 비추는 정경이 연상되는 시다. 일렁이는 강물 위에 길고 넓게 내려앉은 달빛이 고기가 가득 든 그물로 보일 테니 굳이 고기잡이배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남이포에서 청기천 상류 쪽으로 2㎞가량 올라가면 석문고택이 있다. 고택에 들어서니 무위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조성한 '서석지(瑞石池)'가 눈길을 끌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가정원의 연못으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경정(敬亭)' '주일재(主一齋)' 등 서석지 주변에 배치한 건물들도 고졸했다. 그 위로 서광이 비쳤다. 쌍계입암의 진경을 드러낸 봄빛이었다.


# 쓸어내린 듯 봉우리 우뚝, 겸재 또 다른 수작 '성류굴'

쌍계입암과 같은 해에 그린 '성류굴(그림)'도 겸재의 청하시절 수작이다. 그림의 한가운데 거대한 기둥 모양의 암봉이 불끈 솟아 있고, 그 주변에 높이가 암봉의 절반 이하에 불과한 낮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암벽은 짙고 엷거나 느리고 빠른 붓질로 농담의 변화와 속도감을 달리하며 수직으로 쓸어내려 상승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암봉 위에는 노송이 숲을 이뤄 선경을 방불케 하고, 암봉 밑에는 괴수의 눈처럼 굴이 빠끔히 뚫려 음침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 옆으로 휘돌아 흐르는 왕피천이 암봉과 조화를 이룬다.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성류굴은 실물도 그림처럼 깎아지른 벼랑의 암봉이 우뚝하다. 신선이 노닐 정도로 경치가 아름답다는 선유산(仙遊山)으로 실제 해발고도는 199m에 지나지 않는다. 주굴은 길이가 약 470m, 총길이는 약 800m다. 고려 말의 학자 이곡(李穀·1298~1351)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굴 탐사기인 '관동유기'에서 "벼랑 돌이 벽처럼 일천 자는 섰다"고 기록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성류굴에서 하룻밤 자며 이런 시를 남겼다. '성류굴 앞 봄물이 이끼 낀 낚시터에 출렁이고/바위 뒤의 산꽃은 지는 해에 비치네/또 한 가지 청절한 맛이 있는 사람은/밤 깊어 깃들었던 학이 사람 놀라 날음이라'.

글·사진=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