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산 백학봉과 청학봉 사이 60m 높이의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일폭포(왼쪽). 불일폭포로 올라가는 수직 벼랑에 조성된 잔도.

- '선을 좇는 건 등산처럼 어렵고
- 악을 따르는 건 하산처럼 쉽다'

- 지리산 별칭서 딴 아호 '방장산인'
- 쌍계사~불일폭포~신응사 거친
- 12번째 유산기 '유두류록' 남겼듯
- 지리산을 거울처럼 삼고 사랑한 조식

- 험한 산길·장쾌한 불일폭포 보며
- 그가 몸소 터득했을 호연지기
- 천왕봉 꼭대기에 걸려 변함없더라

산은 때론 '거울'이 된다. 개인과 사회의 실상을 비추고 진실을 일깨우는 '이성의 반사경'이다. 산은 그럴 때 단순히 물리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인문의 세계로 들어와 삶을 성찰하고 정화하는 정신의 빛이 된다. 우리 사상사에 실천적 지성의 사표로 우뚝 솟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에게 지리산은 그랬다.

'올곧은 마음을 길러(敬·경) 정의를 세우려(義·의)'는 그의 학문은 만백성을 감싸줄 듯 넉넉하고 의연한 지리산에서 몸소 터득한 호연지기가 바탕이 됐다. 남명의 지리산 본받기는 평생 열두 번의 산행으로 이어졌다. 그는 또 다른 아호를 지리산의 별칭인 방장산에서 따와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 붙일 정도로 지리산을 사랑했다. 남명은 지리산 산행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선 좇는 건 등산처럼 어렵다

	쌍계사 일주문.

남명은 경남 산청군으로 다섯 번, 하동군으로 네 번, 함양군으로 세 번 지리산에 올랐다. 마지막 산행을 한 것은 58세 되던 1558년(명종 13) 음력 4월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이 산행에 대해서만 유산기(遊頭流錄·유두류록)를 남겼다. 두류산은 지리산의 옛 이름이다. 남명은 당시 거처였던 합천군 삼가면 토동 계부당(鷄伏堂)을 출발해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하동에 이른 뒤 화개면 쌍계사(雙磎寺)와 삼신산 불일폭포, 신응사(神凝寺) 등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

남명 일행의 불일폭포 산행은 초여름 장맛비 때문에 쌍계사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일행이 일렬로 늘어서 나무를 잡고 잔도를 타면서 나아갔다고 남명은 산행기에 적었다.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했다. 이곳이 곧 청학동이다.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한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었다." 남명이 언급한 청학동은 현재 널리 알려진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이 아니다. 후자는 1950년 이후 형성된 마을이다.

불일폭포에 대한 남명의 인상은 더 강렬하다. "아래에 학연(鶴淵)이 있는데 까마득해 밑이 보이질 않았다. 좌우상하에는 절벽이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된 폭포는 소용돌이치며 쏜살같이 쏟아져내리다가 합치기도 했다.…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소리가 뒤얽혀 서로 싸우니, 마치 천지가 개벽하려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고된 등산과 달리 쌍계사로 되돌아오는 하산은 '양(羊) 어깻죽지를 삶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끝났다. 남명의 예민한 도덕적 감수성은 이 대조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더니, 아래쪽으로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쏠려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비류직하 불일폭포 '장쾌'

	최치원이 타고 다니는 학을 불렀던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바위.

지난해 12월 22일, 남명의 유산기를 지도 삼아 그가 걸었던 쌍계사~불일폭포~신응사 길을 되밟아 갔다. 쌍계사~불일폭포의 거리는 약 2.5㎞로, 느린 걸음으로 1시간30분가량 걸렸다. 신라 말기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미상)이 속세를 떠나 청학동에서 살며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깃든 환학대(喚鶴臺),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말을 타고 지리산에 오를 때 말발굽 자국이 새겨졌다는 전설이 서린 마족대(馬足臺)를 거쳐 야영장이 조성된 불일평전까지는 순탄한 길이었다.

하지만 불일평전을 지나면서 산세는 확연히 달라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깎아지른 벼랑이 불일암까지 굽이굽이 이어져 나무 덱을 잔도처럼 설치해 놓지 않았다면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려 중기의 승려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 수도했다는 불일암은 1982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된 뒤 새로 지어 옛 자취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불일폭포는 겨울이라 수량이 적어 남명의 산행 당시보다 직하의 체감 강도는 덜할지 모르지만,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 협곡을 타고 60m 높이에서 내리꽂히는 물줄기의 장쾌함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임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학연으로 내려가는 나무·철제 계단을 벼랑에 매달아 놓아 폭포수의 낙하 모습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신응사터 앞에 있는 푸조나무. 최치원이 속세를 떠날 때 꽂아 둔 지팡이에서 싹이 터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4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쌍계사~불일폭포 산행길에 인공의 손길이 가해져 남명이 만끽한 자연미는 적잖이 퇴색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은 게 있다. '선을 좇는 건 등산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건 하산처럼 쉽다'는 진리다.

불일폭포 산행을 즐겁게 마친 남명 일행은 발길을 신응사로 돌렸다. 신응사는 쌍계사 서북쪽 4㎞쯤에 자리한 절로 당시에는 지리산에서 굴지의 거찰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절터인 화개면 범왕리 의신마을 왕성초등학교에는 현재 쓰러진 부도와 부도 좌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왕성초교 앞 도롯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푸조나무가 자라고 있다. 높이 25m, 둘레 6.25m에 가지가 동서 25.9m, 남북 29.2m에 이른다. 수령 약 500세로 추산되는 이 나무는 고운이 세상을 등지고 청학동으로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에서 싹이 터 성장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 앞 계곡에는 고운이 속세를 떠나면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岩)이 있다. 이 당시 신응사 일대는 풍광이 빼어나 서산(西山)대사(1520~1604)가 15세 때 경치에 반해 "고향으로 삼고 싶다"며 출가했을 정도였다.

■백성도 선비도 죽이는 정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말발굽이 새겨졌다는 전설이 서린 바위.

남명 일행은 장맛비로 불어난 계곡의 물구경을 하며 신응사에 사흘을 머물렀다. 이때 절의 승려가 남명에게 "주민들이 부역에 시달려 마을을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고을 목사에게 부역을 조금 줄여달라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주민들의 딱한 처지를 안타까워한 남명은 편지를 써주고는 자책한다. "정사(政事)는 번거롭고 세금은 과중하니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 아버지와 자식이 함께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등 뒤에서 나 몰라라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이것이 어찌 진정한 즐거움이겠는가?" 그의 이런 비판적 현실 인식은 신응사를 떠나 옥종면 정수역에 이르러 더욱 준열해진다.

역관 앞에는 승정원 승지를 지낸 지족(知足) 조지서(趙之瑞·1454~1504) 부인의 정문(旌門)이 세워져 있었다. 이 정문은 현재 정수리 삼장마을에 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사부였던 지족은 연산군이 군주 자질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나 10여 년간 은거해왔다. 그러나 그는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미움을 사 죽임을 당한다. 지족의 부인도 재산을 몰수당하고 성을 쌓는 죄수로 전락한다. 하지만 부인은 두 젖먹이를 안은 채 남편의 신주를 지고 다니면서 조석으로 상식(上食)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남명은 앞서 쌍계사로 오는 도중 악양면 평사리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 집터를 지나면서 1498년 무오사화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뜬 일두를 떠올리고는 비통한 심정을 유산기에 토로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바른 선비 사랑하는 건/호랑이 털가죽 좋아하는 것과 비슷하네/살아 있을 때는 죽이려고 하다가/죽은 뒤에라야 막 칭찬한다네'. 남명은 당시의 무도한 세태를 이같이 읊었다. 그는 일두와 지족에게서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처사(處士)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남명은 "일두와 지족을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하면 십 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격"이라고 했다.

남명은 이 산행 후 기력이 떨어져 더는 지리산에 오르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61세 되는 해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말년을 보낸다. 특기할 만한 점은 남명이 산천재를 건립하면서 본채 양쪽에 동·서재를 세우는 관행을 깨고 서재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힘 없이 천왕봉을 보기 위해서였다. '고상한 마음 천 자나 되어 걸기 어려우니(高懷千尺掛之難·고회천척괘지난)/방장산 꼭대기에나 걸어볼까(方丈于頭上上竿·방장우두상상간)'. 그의 '두류산에서 짓다'는 시의 일부다. 남명은 시처럼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 자신의 마음을 걸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산천재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천왕봉이 남명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