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시 내일동에 자리한 밀양관아. 1927년 철거된 것을 2010년 복원했다. 연암은 감사의 부탁으로 밀양 의옥사건 2건을 포함해 경상감영 관내에서 발생한 미제사건 4건을 공정히 처리했다.

민족문학 최고의 문장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자, 민생 구제에 열과 성을 쏟은 목민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인물평에 흔히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하지만 연암이 범죄 수사와 재판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연암은 1792년(정조 16년) 안의(현 경남 함양)현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경상감영에 들렀다가 당시 감사의 부탁으로 죄를 규명하기 어려운 도내 의옥(疑獄) 사건들을 검토하는 일을 맡아 공정하게 처리한다. 경상감사가 연암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은 연암이 의금부 도사와 한성부 판관을 역임하면서 의옥 사건 해결에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연암이 경상감사에게 올린 4건의 수사결과 검토보고서를 보면,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추리작가 아서 코넌 도일(1859~1930)과 아가사 크리스티(1890~1976)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명탐정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를 연상케 한다. 사건을 풀어가는 수사 감각뿐만 아니라 범죄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의 재능까지 보여준다. 만일 연암이 추리소설을 썼더라면 빼어난 작품을 생산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4건의 보고서는 그 자체로 훌륭한 단편 추리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연암의 추리세계로 들어가 보자.

■"머리털이 강간미수 증거"

	밀양관아 인근 밀양강변에 있는 영남루.

연암이 안의현에 부임하기 전 어느 날, 이웃 고을인 함양군에서 한조롱이란 처녀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한조롱은 어린 남동생과 함께 장수원이란 남자의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수사에 나선 함양군 관아는 한조롱의 머리카락을 확보하고, 장수원으로부터 한조롱과 싸웠다는 진술을 받아낸다. 하지만 장수원이 한조롱을 단순히 위협하고 핍박했다는 선에서 수사보고서를 작성해 경상감영에 올린다. 한조롱이 왜 물에 빠져 죽었는지, 머리카락은 왜 뽑혔는지, 타살 혐의는 없는지 등 여러 의문점에 대한 해명은 빠져 있었다.

수사보고서를 검토한 연암은 '위협과 핍박을 했다는 죄율은 너무 경한 편이니, 중한 편을 따라 논하여 강간미수의 죄율로 처벌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연암의 보고서에 타살 혐의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을 미루어 자살 정황은 뚜렷했던 듯하다. 문제는 자살 이유다. 함양 관아는 장수원의 진술에만 의존한 탓에 납득할 만한 자살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장수원의 진술에는 "(한조롱이) 이를 잡다가 (장수원을) 유혹하고, (한조롱이) 길쌈을 하다 말고 (장수원을) 유혹했다"는 거짓 가능성이 농후한 말까지 포함돼 있었다.

전후 사정을 숙고한 연암은 한조롱의 머리카락과 장수원이 한조롱을 수없이 위협하고 핍박한 것을 들어 강간미수로 단정한다. "강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곁방의 처녀가 무엇 때문에 끌려갔고, 제 놈(장수원)이 끌어가지 않았다면 조롱의 머리털이 어찌하여 뽑혔겠으며, 지극히 분통한 일이 아니라면 (한조롱이) 머리털을 무엇 때문에 꼭 간직해 두었겠나. 이 한 줌의 머리털을 남겨 어린 남동생에게 울며 부탁한 것은 한편으로는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자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죽은 뒤에라도 원한을 씻을 자료로 삼으려는 것이다."

■근민헌과 형틀

	밀양관아 유허비

지난달 24일, 경남 밀양시 내일동에 자리한 밀양부 관아를 찾았다. 연암의 보고서를 당시 사건 심리가 이뤄졌던 현장에서 음미해 보기 위해서였다. 연암이 검토했던 의옥 사건 4건 중 2건이 밀양에서 일어나기도 했지만, 다른 2건의 발생지인 함양군과 현풍현(현 현풍면) 관아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갈 수가 없다. 2010년 복원된 밀양관아에는 동헌과 매죽당, 북별실, 유허비 등이 단장돼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철거된 것을 옛 문헌을 근거로 되살린 것이다.

'근민헌(近民軒)'. 동헌 현판 글이 인상적이었다. '백성을 친근히 하되 낮추어 보지 않는다(民可近不可下·민가근불가하)'는 글귀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헌 마루에는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사건 심리 등 업무를 보는 자못 심각한 표정의 수령 인형이 전시돼 있었고, 마당 한구석에는 죄인을 체벌하던 십자형 형틀이 놓여 있어 당시 취조 상황을 짐작게 했다. 동헌 자리는 아북산 지맥이 뻗어 내린 명당이라는 설명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명당이란 게 문초를 당하는 피의자나 체벌을 당하는 죄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명당 점지 효과는 오로지 수령의 공정한 사건 처리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동헌 오른쪽에는 부사의 비서인 책방이 거처하거나 관리의 자재들이 독서를 했던 매죽당, 왼쪽에는 부사가 외부인을 만나거나 독서를 했던 북별실이 있다. 또 관아 밖 길가에는 부사와 경상감사의 선정을 기리는 유허비 19개가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관아는 지역의 중심지였다. 밀양 역시 관아를 축으로 모든 인가와 상가가 형성돼 있었다. 밀양관아로부터 간선도로를 따라 300m가량 떨어진 밀양강변에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영남루가 수려한 자태로 우뚝 서 있다. 임진왜란 때 100칸에 달했던 관아가 전소된 뒤에는 임시로 영남루 경내에 초옥을 지어 집무를 보기도 했다.

■가혹행위 의혹 해소

	밀양관아 동헌 마당에 놓인 형틀.

연암은 밀양 의옥 사건에 대해 어떤 검토 결과를 내놓았을까. 밀양부 통인청의 아전이 관내 한 절의 돈수라는 스님에게 15대의 태형을 가해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매달 절에서 만들어 관에 바치는 종이를 문제 삼아 처벌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벌이지만, 신체형이 존재했던 당시에는 적잖이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조선시대 신체형은 죄의 경중과 형구에 따라 태형 장형 곤형 등 세 종류로 나뉘는데, 태형이 가장 가볍고 곤형이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밀양 사건이 의옥이 된 계기는 숨진 스님이 속한 절에서 이방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한 단어였다. "지난번 돈수가 통인청에서 형벌로부터 풀려날 때 '절곤(折困)'을 당하여 그로 인해 병사했으니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절곤'이란 '뼈를 부러뜨리는 곤욕을 보였다'는 뜻인데, 결국 정도를 넘은 가혹행위를 해 죽게 했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아전들이 책임을 덜려고 여러 사람이 나서 형벌을 가했다고 밝힘으로써 집단체벌 의혹이 제기됨은 물론 주범과 종범도 가리기 어렵게 됐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목민심서'에 '통인(아전)이 지물(紙物)을 퇴짜 놓은 것으로 위세를 부리니 불가불 단속해야 한다'고 기술할 정도로 당시 절의 관납에 대한 아전의 횡포가 심했다. 그런 만큼 아전의 가혹행위에 대한 의혹을 가질 만도 하지만, 연암은 치우침이 없이 객관적인 증거를 토대로 논리적인 판단을 해나간다. 먼저, 연암은 "절곤은 결곤(決棍·곤장으로 죄인을 치는 형벌을 집행하는 일)의 오기"라고 추리한다. 이에 대해 그는 "'결' 자를 '절' 자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은 상민들의 통폐요, '곤(棍)' 자를 '곤(困)' 자로 잘못 기록한 것은 무식의 소치다. 보는 자의 선입견이 절랍(折拉·부러뜨림)의 '절' 자에 놀라고, 곤박(困迫·곤욕을 보임)의 '곤' 자에 더욱 현혹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연암은 치밀한 분석을 덧붙인다. "옥사의 진상을 들어 판단한다면 15대의 태형으로 어찌 목숨을 잃을 리가 있으며, 더욱이 두서너 곳의 상처도 급소가 아니다. 통인들이 종이 자르는 판자를 장척(長尺)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통인 우두머리가 볼기 치는 막대인즉 통인들이 이것으로 벌을 시행하고 더러는 속여서 태(笞)라고 한다. 이 장척을 잘못 보고서 곤(棍)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으니, 상식적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연암의 검토에 힘입어 여러 해 동안 결말을 못 짓고 있던 이 사건은 절곤의 가혹행위는 없었다는 쪽으로 정리된다.

연암의 보고서를 보면 그의 생동하는 사실적인 문체와 실용적 애민행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과학적인 관찰과 분석, 판단 아래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합리적 의식과 사고가 그 배경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주체적 근대정신의 기원을 연암에게서 찾을 수 있다. 연암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를 성찰해 봐야 할 이유다.


# 연암과 점필재의 인연, 300년의 시간 너머 학사루는 알고 있다

밀양관아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의 부북면 제대리와 후사포리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생가와 그를 배향한 예림서원이 있다. 생가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낡고 허물어진 것을 1810년 사림과 후손들이 중건해 재사를 추원재(追遠齋), 당호를 전심당(傳心堂)으로 정해 후세에 전했다. 서원은 당초 1567년 덕성서원이란 이름으로 자시산 기슭에 창건되었다가 1634년 상남면 예림리에 옮기면서 이름을 예림서원으로 바꿨다. 1680년 화재로 전소돼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지난달 24일 방문한 이들 건물은 점필재의 올곧은 성품처럼 고졸한 정취를 풍겼다.

조선 사림파의 조종인 점필재는 연암이 현감으로 재직했던 안의현의 이웃 고을인 함양군의 수령을 지냈다. 점필재와 연암이 살았던 시대는 300년의 시간 차가 있지만, 현재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學士樓·사진)를 매개로 긴 세월을 뛰어넘은 인연을 맺는다. 점필재는 1471년 함양군수 재직 시절, 학사루에 걸려 있던 훈구파 유자광(柳子光·1439~1512)의 시를 새긴 현판을 발견하고는 "그따위 자광이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며 철거하여 불태워버리게 했다. 이 사건은 1498년 무오사화를 주모한 유자광이 점필재에게 복수하는 주요 배경이 된다.

연암은 1794년 함양군수 윤광석(尹光碩)이 녹봉을 털어 학사루를 수리한 뒤 글을 부탁하자 '학사루기'를 짓는다. "천령(함양)의 백성들은 문창후(고운 최치원, 신라시대 천령군 태수를 역임)가 끼친 은혜를 생각하여 지금도 그 누각을 학사루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그가 이곳을 거쳐 갔음을 기념한 것이다.(…)대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한 마리의 학이 공중에 날면 흡사 학사가 하늘 드높은 가을을 시로 읊는 듯이 여겨 왔으니…." 고운에서 점필재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은 연암의 글에서 개결히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