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제 다섯 달이 지나면 가신지 삼 년이 되는군요. 사십 년 동안 1년 365일을 새벽부터 밤까지 시장 한 데서 지내셨는데, 양지바른 따뜻한 곳에 모셔 드리지 못해 죄송하기만 합니다. 새로운 소식은 얼마 전까지 꼿꼿하시던 과일집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치매에 걸리셨답니다. 소고기집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늘 함께 점심을 드십니다.

아버지, 얼마 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습니다.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늘 국제시장을 부러워하시던 아버지와 함께 보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함께 처음 국제시장을 들렀던 사십 중반의 아버지 얼굴과 길 잃어버리면 큰일 난다고 내 손을 꽉 쥐시던 단단한 손매가 기억나더군요.

사십 년 전 영도에 들어와서 남의 집 나무마루를 방으로 삼아 지내다 어머니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져 놀랬던 날들. 낡은 목조건물에서 불이 나 식겁을 하던 날들. 비좁은 시장에 들이닥친 환경정비용 노란 트럭이 청년의 과일 리어카든, 고등어 담긴 할매의 빨간 대야든 싹 쓸어 가버리고 나면 시장 가득 차던 울음들. 시장은 생기왕성한 곳이 아니라 막다른 인생들의 전쟁터였지요. 나이키나 프로스펙스 같은 브랜드에 밀려 명절 대목이 점점 사라지고 시장 사람들이 하나 둘 어디론가 떠났지요. 그때 떠난 사람들이 아마 '송파구의 세 모녀'와 같이 됐을 터이고, 혼자 죽음을 맞이는 독거 어르신이 됐을지 모릅니다.

지붕만 올린 재래시장의 현대화의 그림자만큼 시장어르신들의 주름은 깊어가고 허리는 이미 굽으셨지요. 지난하게 살아오신 삶들, 명민하지 못한 저는 아직도 알 길이 없습니다. 외환위기 터지고 얼마 뒤 제가 결혼할 때 "이 시장이 이래 될지 누가 알았겠노? 우리 때는 배고프게 지내왔지만,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살았는데…. 미안하데이. 우리 시대하고 너그들이 살 시대는 다른 것 같다"하셨던 말씀이 맞았습니다. 저를 걱정하시지 마세요.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공부해 25년을 오로지 취업에만 목숨을 겁니다. 다행히 취업을 한다 해도 열에 다섯은 비정규직이라 봉급도 반토막이고, 언제 해고될지 아무도 모르는 불안에 떨지요.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평생 삶은 은행과 사채에 저당잡혀 있어 죽을 때 남길 건 빚밖에 없을 겁니다.

아버지, 함께 질곡의 세월을 뚫고 지내온 어르신들께 감히 부탁하고 싶은 말씀으로 글을 맺을까 합니다. 허무맹랑한 정책으로 텅 빈 국고를 메운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나 털어 의기소침하게 하는 결정에 손들어주지 마시고, 줬다 뺏는 연금정책을 선심으로 고마워하지 마시고, 아이들이 행복한 환경을 만드는데 열심히 투자하는 정책에 힘을 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청장년들의 땀과 피를 뽑아먹는 비정규직 같은 것은 없애거나, 여자나 남자나 열심히 일하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잘 만들고 돌볼 수 있게 하는 복지정책에 힘을 실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사람들이 곧 어르신들의 자녀이고, 그래야 어르신들을 잘 돌볼 수 있는 건강한 가족과 사회가 만들어질 테니까요.

윤성호·동서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