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억새가 흐드러지게 핀 제주 산굼부리. 억새군락지 너머로 제주 오름들이 보인다.

가을은 단풍의 계절입니다. 울긋불긋 온 산을 수놓은 단풍잎은 깊어가는 가을을 상징합니다. 가을은 또한 억새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억새는 단풍과 다릅니다. 누런 모습에서 점차 시간이 지나면 은백색으로 변하는 정도의 억새는 단풍에 비하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색채의 향연을 펼치기보다 무채색의 미로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치유합니다. 그리고 화려하지 않으면서 화려합니다. 알록달록 생동력 있는 색감은 없지만, 가을바람에 화려하게 춤을 춰 장관을 이루는 까닭입니다.

억새의 매력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강인함입니다. 솜털처럼 보드라운 이파리는 몰아치는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다가올 추운 겨울을 이겨낼 생명력을 억새는 이렇게 보여줍니다. 바로 이 점에 사람들이 억새에 열광하는 게 아닐까요?

가을에 피는 억새는 10월과 11월 절정을 이룹니다. 전국적으로 억새 명소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주도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제주는 섬 전체가 억새밭이라고 할 정도로 억새가 유명합니다. 시내를 벗어나 도로를 달리다 보면 산과 들 여기저기에 만발한 억새를 만날 수 있습니다.

대규모 억새군락지가 있는 산굼부리를 비롯해 숲 속 기차를 타고 억새를 만날 수 있는 에코랜드, 억새 사이로 보이는 '방목 말'이 절경을 이루는 성이시돌목장 등이 제주의 억새 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라산 중산간도로인 산록도로(남·북로)와 동부의 금백조로, 동남부의 남억새 제주오름길 등은 억새 드라이브 길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정일근 시인은 '가을 억새'라는 시에서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이별의 손짓'으로 말했습니다.

시인의 표현대로 가을바람에 가볍게 살랑이며 이별의 아쉬움을 전하는 억새를 기대하고 갔지만 실제(?) 모습은 달랐습니다. 억새 취재를 위해 찾은 지난 주말 제주는 마침 북상하는 태풍 '봉퐁'의 간접영향을 받았습니다. 강한 바람에 억새는 '회오리'를 칩니다. 쓰러졌다가 일어나길 반복하며 온 힘을 다해 '군무'를 펼칩니다. 이보다 역동적인 춤이 또 있을까요?

억새는 9월부터 피기 시작해 누런색을 띠다가 10월 중·후반부터는 점차 은백색으로 변합니다. 10월 중·후반, 11월 초에는 은백색의 옷으로 갈아입은 절정의 억새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은백색의 격렬한 춤을 추는 억새를 보고 싶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가을 억새'를 보기 위해 제주로 떠났다. 시내를 벗어나면 도로 어디든 억새가 만개해 쉽게 억새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대규모 억새 군락지와 숲 속 억새길 등 제주의 '억새 명소'를 둘러봤다.

■산굼부리

한 여행자가 제주 산굼부리 억새군락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시 조천읍 산굼부리는 요즘 억새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제주에는 한라산 주위로 총 368개의 오름(분화구를 가진 소형 화산)이 있는데 산굼부리도 그중 하나다. 굼부리는 제주어로 분화구를 뜻한다. 산 분화구라는 말이다.

산굼부리는 억새길로 유명해졌지만 자연생태적으로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마르형 분화구인 산굼부리는 천연기념물 제263호다. 마르란 용암이나 화산재 분출 없이 가스 폭발로 푹 꺼져 폭삭 주저앉은 형태의 분화구를 뜻한다. 바닥은 현무암 자갈로 이뤄져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백록담처럼 물이 고이지 않는다. 산굼부리 정희준 자연환경해설사는 "깊이 132m, 둘레 750여 m의 분화구 내 420여 종의 식생이 존재한다. 특히 난대식물인 상록활엽수와 온대식물인 낙엽활엽수가 동시에 서식하고 있어 자연생태환경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고 자랑했다.

산굼부리는 거대한 분화구의 오름을 비롯해 분화구 주위에 형성된 드넓은 억새군락지, 끝없이 연결된 제주의 돌담, 국제 멸종위기종인 구상나무가 풍성하게 이어진 숲길, 제를 지내고 산행을 하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사슴상, 제주 전통방식으로 안장된 묘를 볼 수 있는 소굼부리 등 둘러볼 곳이 많아 두어 시간 정도 넉넉히 잡고 가는 것이 좋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참억새 군락지에 모여 있다. 억새 사잇길을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걸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 억새군락지는 지난해 드라마 '결혼의 여신' 촬영장소가 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입장료 6000원. 문의 (064)783-9900

■에코랜드

에코랜드 테마파크에서는 숲기차를 타고 한라산 원시림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다.

산굼부리 인근의 에코랜드 테마파크는 숲기차를 타고 다니며 억새를 구경할 수 있다. 곶자왈(제주어로 숲이란 뜻)을 기차로 여행하는 생태공원이다. 숲기차는 메인역을 출발해 에코브릿지역에 정차한다. 이 역에서 하차해 도보로 레이크사이드역으로 이동한다. 레이크사이드역으로 가는 10여 분 정도의 길에서 여러 절경을 만난다. 6만6000㎡(2만 평) 호수 위에 300여 m의 수상덱이 설치돼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할 수 있는 수상공원과 풍차, 삼다정원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삼다정원에는 억새 산책길이 펼쳐져 있다.

레이크사이드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피크닉가든역에 내려 에코로드를 걸어보자. 에코로드는 제주도 보존자원 제1호인 화산송이(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화산재 알갱이)로 전 구간 도로가 포장된 곶자왈 숲길을 지칭한다.

둘러보는데 10분 정도 걸리는 단거리(400m)와 40분이 소요되는 장거리(1.9㎞) 코스 중 선택할 수 있다. 장거리 코스에서는 은백색의 억새를 만날 수 있는 억새길을 비롯해 족욕을 즐기는 에코테라피 시설, 화산송이 맨발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라벤더 그린티&로즈가든역에 내려 유럽식 정원을 구경한 뒤 다시 메인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곶자왈 숲 해설과 힐링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다. 프로그램 시간은 인터넷 홈페이지(www.ecolandjeju.co.kr) 또는 전화(064-802-8020)로 문의하면 된다. 입장료 1만2000원.

■성이시돌 목장

한 폭의 그림 같은 성이시돌 목장의 폐건물 '테쉬폰'.

제주시 한림읍 성이시돌 목장은 요즘 사진동호인 사이에 출사장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핫'한 장소다. 스페인 성인의 이름을 딴 성이시돌 목장은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가 1961년 제주도민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든 목장으로 지금은 소와 말 등을 사육하고 있다.

목장으로 가는 도로변에 수북이 핀 억새가 여행자를 반긴다. 목장에는 돌로 만들어진 폐건물이 눈에 띈다. '테쉬폰'이라는 명칭의 건물로, 처음 목장이 만들어졌을 때 인부들의 숙소로 사용됐으며 그 이후에는 사료공장 등으로도 활용됐다.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 테쉬폰 지역의 건축양식이라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둥그런 곡선 형태인 지붕의 오래된 폐건물 테쉬폰,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앙상한 나무, 저 멀리 보이는 억새와 한쪽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말들은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억새 드라이브길

억새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산록남로.

시내를 벗어나면 어렵지 않게 억새길과 마주한다. 특히 한라산 주위 중산간도로에는 멋진 억새 드라이브길이 많다. 한라산 중산간도로인 산록도로는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다. 산록남로는 28㎞에 이르는 한라산 남쪽 1115번 도로 일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산록남로 도중에 위치한 포도호텔에 들러 억새 구경을 해보자. 세계적 건축가인 이타미 준이 설계한 포도호텔은 제주의 오름과 초가집을 모티브로 한 자연주의 건축물이다. 억새 사이로 보이는, 포도처럼 송이송이 이어진 포도호텔의 모습이 장관이다. 산록북로는 한라산 북쪽 관음사 일대 1117번 도로(9㎞). 한라산 중턱의 산길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여유롭게 드라이브할 수 있다.

동부 중산간도로인 금백조로 역시 억새 드라이브길로 유명하다. 성산읍 수산리에서부터 백약이 오름까지 7㎞ 구간의 마을길을 억새를 구경하며 천천히 지나보자. 저 멀리 오름 사이로 보이는 풍력발전기가 이색적이다. 마침 태풍의 영향 때문인지 풍력발전기는 더욱 힘차게 돌았다. 동남부 중산간도로인 성읍민속마을에서 성산읍 수산리까지 1119번 도로인 남제주 억새오름길도 억새명소로 유명하다.


# 제주서만 맛 볼 수 있는 맛

- 자리돔젓갈에 찍어먹는 보쌈 돔베고기
- 화강암 돌판 위 꽃멜젓과 먹는 흑돼지구이
- 쇠고기와 다른 차원 얇게 뜬 말고기 육회

'돔베돈'의 흑돼지구이.

제주에는 이름난 맛집이 많다. 특히 제주 특산품인 흑돼지와 말고기는 제주도에 놀러가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꼽힌다.

제주 시내 흑돼지 거리의 돔베돈(064-755-0006)은 돔베고기와 흑돼지구이를 함께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돔베고기는 돼지를 삶아 만든 수육에 무김치를 곁들여 먹는 제주식 보쌈요리다. 돔베고기와 흑돼지구이가 한 세트로 나온다. 흑돼지가 다 익기 전까지 출출할 때 돔베고기를 먹으면 된다. 돔베고기가 전채요리인 셈이다. 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식감의 돔베고기는 시큼새콤한 맛간장과 짭조름한 자리돔젓갈에 찍어먹으면 된다. 이 집 돔베고기는 한 두시간 간격으로 삶기 때문에 오래 보관한 보쌈에 비해 질기지 않고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돔베고기를 다 먹었다면 흑돼지구이를 맛볼 차례다. 흑돼지구이는 오겹살 목살 가브리살 항정살 등 4개 부위가 나온다. 꽃멜(꽃멸치)젓을 제주 화강암으로 만든 돌판 위에 올려 끓인 뒤 익은 고기를 찍어먹으면 된다. 꽃멜젓은 꽃멸치가 통째로 들어있는 게 보일 정도로 푹 삭히지 않고 약간 삭힌 게 특징이다. 그래서 비린 맛이 덜하고 고기의 기름기를 덜어준다. 고기를 다 먹었다면 냉면은 꼭 맛봐야 한다. 고구마 전분만으로 이 집에서 직접 제면한 냉면은 돼지고기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기에 충분하다. 가격은 2인 세트 3만9000원.

'말이랑 흑도새기랑'의 말고기 육회.

제주도립미술관 인근의 말이랑 흑도새기랑(064-744-7031)은 흑돼지와 말고기를 함께 맛볼 수 있는 맛집이다. 고기는 사오는 게 아니라 모두 이 집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직접 사육한 것만 쓴다는 게 다른 식당과 다르다. 흑돼지는 물론 식용 말고기도 직접 기른다. 찬으로 나오는 쌈채소 나물 등 채소 역시 식당 옆 너른 밭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채소다. 그래서 신선하고 건강한 제주의 맛을 보려면 여기가 제격이다. 흑돼지구이는 오겹살 목살 가브리살 항정살 등을 부위별로 즐길 수 있다. 말고기는 특히 육회가 인기다. 얇게 뜬 말고기 육회는 기름장에 찍어먹으면 된다. 고기 비린내가 전혀 없고 아주 부드럽다. 쇠고기 육회랑은 식감이 또 다르다. 고기를 다 맛봤다면 뜨끈한 우거지해장국으로 마무리하면 된다. 우거지 해장국은 푹 삶은 듯 하지만 아삭아삭한 우거지의 식감이 독특하다. 흑돼지는 부위별로 200g 1만4000원~1만7000원, 말고기 육회 1접시 3만 원.

가벼운 맥주 한 잔은 여행의 또다른 재미다. 제주 연동 제스피(064-713-7744)는 삼다수를 만드는 제주개발공사가 제주산 보리로 제조한 하우스맥주 5종을 선보인다. 라거 맥주인 필스너는 청량감이 돋보인다. 에일 맥주로는 감귤향이 도는 페일에일과 밀로 만든 바이젠, 흑맥주인 스타우트, 진한 맛이 일품인 스트롱에일이 판매된다.

글·사진=이선정 기자 sjlee@kookje.co.kr
취재협조=제주도관광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