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승 이용한 탕요리 솜씨좋던 이북사람들
-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피란와 정착
- 돼지국밥 만들면서 부산 향토음식 돼
- 마트서 5년간 근무, 재료 공부부터 시작해
-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마리 뼈 다 고아
농경사회였던 한반도에서 소는 농사의 근간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소를 '일소'라 했다. 소를 키우는 꼴과 여물도 인간의 식량이 아니었다.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남겨 인간을 이롭게 했다. 하지만 돼지는 달랐다. 먹는 것부터 인간의 몫과 나눠야 했고, 오로지 식용 외에는 쓸모가 없었다.
그러니 많이 키울 수도, 함부로 잡을 수도 없었다. 대신 식용이라는 한 가지 목적만 가진 만큼 샅샅이 먹어 치웠다. 살코기와 내장은 물론이고 뼈까지 활용했다. 뼈를 곤 돼지국밥은 보다 많은 사람이 고깃국을 나눠 먹기 위해 고안되었다. 일상의 음식은 아니지만, 그 근원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부산의 돼지국밥에는 조금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많은 피란민이 부산에 정착했다. 고려 시대부터 소·닭·꿩 등을 이용한 탕이 발달했던 이북 사람들의 솜씨가 돼지국밥과 결합했다. 일종의 기술 제휴였던 셈이다. 그리고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돼지국밥은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되었다.
반세기가 한참 지나 이를 '세계화하겠노라!' 도전장을 던진 이가 나타났다. 부산 사상에서 나고 자란 손세원(36)은 '국밥키드'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맛본 이후로 질릴 정도로 돼지국밥을 즐겨 먹었다. 그래도 질리지 않더란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손세원은 2004년 미국 유학을 갔다. 본래 곁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떨어지면 더 또렷해지는 법이다. 2년 동안의 미국생활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돼지국밥이었다. 그런데 그가 생활하던 워싱턴 D.C 근교 소도시에서 베트남의 쌀국수집과 일본의 라멘집은 줄을 설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쌀국수와 라멘으로는 풀리지 않는 갈증과 '돼지국밥은 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귀국 후 돼지국밥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결심한 손세원은 틈만 나면 '국밥기행'을 다녔다. 하루 세끼를 국밥으로 때우는 날도 흔했다. 다들 나름의 장점은 있었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결국 국밥 기행은 진로를 바꾸는 여정이 되고 말았다.
우선 손세원은 건축가로서 자신의 연봉에 절반도 안 되는 급여를 받고 대형마트에 취직했다. 5년 동안 구매 담당자로 근무하며 돼지고기와 채소 등의 식재료를 공부했다. 퇴사 후에는 재래시장에 빈 점포를 얻어 가마솥을 걸고 연구를 거듭했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2011년 3월 모라동에 팔복돼지국밥을 열었다. 하나의 음식이 향토음식으로 굳었다는 것은 그만큼 지역민들이 즐겨 먹고, 그만큼 평가도 까다롭다는 의미다. 냉정한 부산 사람들의 입맛에 손세원의 돼지국밥은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재료를 이해하고 원리를 터득한 처지에 고객의 비판은 오히려 약이 되었다. 1년 6개월 만에 팔복돼지국밥은 국밥 마니아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올 3월에 문을 연 김해점은 진작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다.
팔복돼지국밥에서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돼지 한 마리 분량의 뼈를 모조리 곤다. 그것이 돼지국밥의 원형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돼지 뼈는 부위별로 고소한 맛, 시원한 맛, 감칠맛 등의 강약이 다르다. 이들의 조화를 이끌어 내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만만찮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손세원의 돼지국밥은 돼지 국물이 어쩌면 이리도 깔끔할까 싶을 정도로 곱다. 최고의 돼지를 선별하는 안목과 요령을 피우지 않고 원칙에 충실한 작업과정 덕분이다. 여기에 경험까지 더해지니 국물의 완성도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진다.
손세원은 '인종·문화·지역·남녀노소를 초월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돼지국밥'을 지향한다고 했다. 그게 대체 어떤 맛인지, 그리고 가능한지, 그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 대신 '국밥홀릭'이라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돼지국밥에 미친 그라면, 어쩌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부산의 향토음식인 돼지국밥은 한국전쟁 이후로 또 한 번의 '사건'을 맞게 될 것이다.
부산 태생인 손세원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유통회사에서 농산물 구매담당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팔복돼지국밥 모라점과 김해점을 운영 중이다.
박상현·맛 칼럼니스트